왜 이렇게 되었을까?
곰곰 생각해 보았습니다.
남편의 말을 종합해 보았죠.
어쩌다 그렇게 되었고, 남자는 평생 한두 번 바람이 나게 마련이며, 제가 잘못한 점이 없다고 했고,
두 여자를 다 데리고 살고 싶다....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죠.
아, 그여자는 남자를 잘 다루는 구나.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남자를 대하는 일에는 젬병인 셈이죠.
특히 잠자리 같은 일 말이에요.
아, 그거구나!
그러니까 남편인 저에게는 직장 다니면서 아이들 기르고 살림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고,
그 여자에게는 잠자리나 서비스 같은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거요.
남편의 상대가 술집 마담이라는 사실이 그것을 암시해 주었죠.
저는 패배감을 느끼면서 그때서야 방중술 같은 책을 뒤적여 보았습니다.
남자를 사로잡는 기술이라는 것이 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더군요.
허나 남편의 태도에 잔뜩 실망한 저는 그렇게까지 노력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당시에는 여자에게 슈퍼우먼이 요구되던 시절이었죠.
직장에 나가 일하면서도 살림에 허점이 없어야 된다는 것 말이에요.
아침 출근 시 반듯하게 다려놓은 와이셔츠에 단추라도 떨어져 있는 날에는 남편의 불호령이 떨어졌죠.
그 따위로 살림하려면 직장 때려치우고 집에 있어!
남편이 마치 아내의 소유주인 것처럼 거드름을 떨어도 되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남편이 냉장고 옆에서 아내에게 냉수 꺼내 달라고 하던 시절이었다니까요.
믿어지세요?
그러니 직장 다니랴, 살림하랴, 아이들 키우랴, 며느리 노릇하랴, 딸 노릇하랴,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었죠.
휴우, 그때 그 시절을 생각만 해도 답답해지네요.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힘든데 잠자리에서 술집 여자처럼 아양을 떨면서 사는 일까지 보탤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는 남편에게 이혼하자고 했어요.
그 일은 그 여자들이 전공이잖아요.
사실 잠자리에서의 불만은 제가 더하면 더했지 남편보다 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내 사전에 이혼이라는 말은 없어.
남편이 화를 내며 말하더군요.
그렇고 그런 삼류 얘기죠.
허나 다들 비슷한 모양새로 살고 있는 거잖아요.
이혼을 강행하겠다고 했더니 그러면 아이들을 절대 줄 수 없으며 만나지도 못하게 하겠다고 하더군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얘기라니까요.
그때는 법이 어떤 상황에서건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던 때였습니다.
저의 당시의 감정 상태는 남편 없이는 살아도 아이들 없이는 못 살 때였어요.
그러니 아이들을 만나지도 못하게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이혼을 막기 위한 극약처방이었죠.
하는 수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멀리 외국에라도 도망칠 궁리를 치밀하게 하고 있었는데, 친정어머니가 느닷없이 끼어드셨죠.
남편이 없는 것 보다는 그래도 있는 게 나아.
의논할 상대라도 있는 거잖니...
과부로 오래 살아오신 어머니의 경험담이 이 한마디에 녹아 있더군요.
결혼할 때에도, 그 이후에도 남편의 무질서한 생활태도를 몹시 싫어하시던 어머니의 이 말씀에 많이 고민했죠.
헌데 막상 남편이 싫어지니까 그때까지는 꾹 참고 살던 그 사람의 음주벽이 갑자기 너무 싫어지는 거였어요.
그는 매일 술을 마시는 사람이었죠.
어떤 때는 낮부터요.
술 마시는 이유야 다 같겠지만 그는 참으로 술을 좋아했어요.
술만 마시면서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하다고 했지요.
순전히 말로만요.
남들 하는 것은 다 하면서, 더 하면서 살았으니까요.
어느 날은 술에 절어 부릉부릉 코를 골며 자는 모습을 보니 마치 짐승이라도 보는 느낌이었죠.
소름이 돋더군요.
저는 하넙 싫어지면 딱 싫어지는 타입이랍니다.
그 꼴을 보면서는 단 하루도 더는 못살겠더라고요.
그래서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청개구리 기질의 저는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는 그 길로 달랑 가방 하나 들고 아이들 손잡고 개선장군처럼 집을 나왔죠.
예나 지금이나 성질 한번 급하답니다.
생각이 정해지면 즉각 행동개시에 들어가니까요.
헌데 시동 걸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은 좀 길어요.
처음에는 후련하더군요.
허나 그 이후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그러나 저만 고생한 것이 아니라 고생은 우리 모두의 일이잖아요.
이 세상에 태어나서 고생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야 말이죠.
결혼하면 한 대로, 이혼하면 한 대로, 혼자 살면 혼자 사는 대로, 불륜을 저지르면 저지르는 대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면서 사는 거잖아요.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온갖 경험을 통해서 배움을 얻자는 것이 아닌가요?
배움을 얻으면 얻은 만큼 현명해지니까 학교에 수업료를 내듯 인생 공부를 위해 스스로에게 수업료를 내는 거라고 위로하면서 살았죠.
자살 얘기를 하려다가 사는 얘기가 지루하게 나왔군요.
자살로 돌아가겠어요.
직장 다니면서 아이들 기르느라 정신없이 살 때는 그래도 괜찮았어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생활이 안정되면서부터는 자나깨나 외롭군요.
외롭기만 하다면 참겠는데 비죽비죽 노여움이 솟아나오는 거예요.
남편을 비롯해서 모든 남자들에 대한 노여움 말이에요.
모든 남자라고 하니 좀 우습군요.
헌데 여자들은 한 남자를 통해 세상을 보는 법이어서 한 남자를 좋아하면 모든 남자들을 좋아하게 되고 한 남자를 미워하면 모든 남자들이 미워진답니다.
또 한 남자의 사랑을 얻으면 천하를 얻은 것같이 의기양양해지고, 한 남자에게 배신당하면 천하를 잃은 것같이 비참해진답니다.
모르셨죠?
모든 여자들이 다 그렇지는 않아도 대체로 그렇더라는 말이지요.
마리아 칼라스라는 그리스 출신 소프라노 가수를 아시죠?
신이 내린 목소리로 한 시대를 멋지게 풍미하던 그녀가, 연인이었던 오나시스가 재클린과 결혼하자 형편없이 무너졌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에 열 시간씩 연습을 하며 자신을 단련했다는 그녀도 사랑 앞에서는 여약하기 짝이 없었나 봐요.
또 한 여자가 생각나는군요.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유명한 조각을 한 로뎅의 연인, 프랑스인 조각가 까뮤 끌로델 말이에요.
어쩌면 로뎅보다도 더 재능 있다고 평가되던 미모의 그녀는 로뎅이 다른 여자를 평생 가까이 하며 양손에 떡을 쥐고 놓치 않자 자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정신병원에서 40여 년을 지내다 아주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였답니다.
영국의 다이애나 황태자비도 떠오르는군요.
영국인의 자랑이었던 그녀도 찰스의 사랑을 얻지 못하자 그런 식으로 죽고 말았죠.
그러니 속절없이 사랑에 몰입하는 여자들의 속성은 사랑 때문에 인생 전체를 망하게도 하고 흥하게도 하는가 봅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결코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죠?
아무튼 저는 두 남자를 미워했으니 따따블로 세상 남자들이 미워지더군요.
미워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패배감에 젖어 살아갈 힘을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 한 남자는 누구냐고요?
이제부터 말씀드릴게요.
[ 황진이, 선악과를 말하다, 3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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