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아버지의 기일이 12월 8일입니다.
그날 돌아가신 것은 아니지만, 12월 9일에 집을 나갔다가 실종되셨기 때문에
그 전날인 12월 8일을 기일로 삼아 제사를 모셔 왔습니다.
당시 6.25 전쟁 중이었는데, 살고 계시던 원산에 폭격이 너무 심하니까
배를 타고 그 앞의 모도라는 섬에 피난을 가셨다고 합니다.
가보니까 경주에 있는 왕릉 몇 개를 합친 정도의 작은 섬이었다고 합니다.
아홉 가구 정도가 사는 곳이었는데 밤중에 도착해서 보니까
수백 명이 거기에 피난을 와 있었다고 하고요.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오래 있을 만하지 않다. 배를 구해서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겠다.'라고
판단을 하셨답니다.
가족과 함께 얼마간 지내시다가 어느 날 배를 구하러 나가셨는데 행방불명이 되셨습니다.
한겨울에 나갔다가 안 들어오신 것이었지요.
그래서 해마다 12월 8일에 모여서 제사를 지내왔는데,
제 형부중 한 분이 아버님의 정확한 기일을 알고 싶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어렵지 않으니 한번 알아보겠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제 입장에서는 기일을 아는 것이 별 의미는 없습니다.
이미 아버지가 천도가 되셨고, 제사에 오시지도 않고, 또 잘 계시기 때문에
'기일이 9일이면 어떻고 다른 날이면 어떤가?' 하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래도 정확한 날을 알기 위해서 아버지를 청해서 기일을 여쭈었더니
'음력 10월16일, 오후 3시경' 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따져보지도 않고 그대로 전했는데, 형부가 계산을 해보니까
그날이 양력으로는 11월 25일이더랍니다.
식구들과 12월 8일까지는 함께 계셨는데
말씀해 주신 돌아가신 날은 그날보다 보름쯤 더 빠르더라는 것입니다.
저도 이상해서 다시 청하여 여쭈어 봤습니다.
사실 돌아가신 분을 자꾸 불러 일으켜서 좋은 일은 아닙니다.
살아생전의 기억을 자꾸 불러 일으켜서 좋을 게 없기 때문입니다.
진화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기운은 보내드려도
자꾸 불러내서 여쭙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죄송하다고 하면서 다시 여쭈어 보았습니다.
날짜가 맞지 않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다고 여쭈었더니,
'향천 날짜를 하늘이 다 정해 놓으셨었는데 제 날짜에 향천하지 못했다' 고 말씀하시더군요.
또 하늘이 준비해 놓으신 방법으로 향천하지도 못했다고 하시고요.
인재人災에 의해 돌아가신 것이지요.
원하지 않는 날짜에, 원하지 않는 장소에서,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향천하셨기 때문에
본인이 생각하시기에 가장 좋았던 시절,
가족들과 함께 좋았던 시절을 향천일로 잡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는 자신이 가족들과 갈 길이 달라서 일찍 향천하게 된다는 생각을 안 하셨고,
가족들과 굉장히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화목한 장소를 떠나는 날을 기일로 잡으셨다는 것이지요.
그 말씀을 듣고 제가 상당히 슬펐습니다.
돌아가신 날짜, 돌아가신 방법, 돌아가신 장소.....,
이런 것들이 후손들에게 파장의 동조를 일으켜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좋았던 날을 임의로 선정해서 기일로 잡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계의 허락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돌아가신 날을 임의로 정한다는 것은 제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아버님은 한 수 위이시더군요.
'과연 제 아버지님답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그렇게 '돌아가신 분이 가장 좋았던 날을 기억해 주십사' 하는 부탁 말씀을 드립니다.
그것이 고인의 뜻이라는 것을 아버지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조상님들 중에서 좋지 않은 방법으로, 좋지 않은 장소에서,
하늘이 정하지 않은 날짜에 향천한 분이 계시다면,
기일을 좀 앞당겨서 좋은 파장을 지닌 순간을 향천 일로 삼아도 된다는 배움을 얻었습니다.
그런 의도로 향천일을 바꾼다면 선계에서도 기꺼이 허락을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어집니다.)
[4장. 장례와 제사를 잘 지내는 법-장례, 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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