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에서 조선 시대로 넘어가는 가교를 세운 사람이 태조와 태종이라면, 그 다리를 건너 500년 왕조와 굳건한 토대를 세운 것은 바로 세종대왕이다. 그는 과학과 농법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정리하고 발전시켰다. 그뿐 아니라 역사상 최고의 발명품인 한글까지 만들어냈다. 이는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뛰어난 인재를 얼마나 많이 모아 그들의 능력을 끌어내는냐에 딸려 있는 것이다. 단순히 왕권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그는 필요에 따라 적절히 움직이는 법을 알고 있었다. 세종대왕 자신도 뛰어난 지식인이었지만, 그보다 그는 인재 경영에서 매우 뛰어난 리더였다고 할 수 있다.
실력 위주의 등용
세종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세 사람을 만나고 있을 때였다. 세종은 차례로 그들의 집안 내력과 학문의 깊이에 대해 물어보았다. 세 번째 사람은 성삼문이었다.
"자기 소개를 해 보거라."
성삼문은 질문이 떨어지자 거침없이 말했다.
"전하께서 성덕이 높으시다는 소문을 멀리서나마 듣고 늘 흠모해 왔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앞으로 전하의 시대를 열어 가야 하는데, 인물의 됨됨이를 보지 않으시고, 그가 어떤 명문가의 자제인지, 또 그의 아비가 누구인지, 어떤 배경인지에 대해서만 물으시니 오늘 적잖게 실망했습니다. 소생은 지리산 촌동네의 이름 없는 쇠락한 선비 가문의 자식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앞날을 위해 죽도록 일할 준비가 누구보다도 단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당돌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그 대답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바른 말이고 옳은 얘기다. 앞으로 과인에게 직언으로 대하고 나를 많이 도와 달라."
세종이 임금으로서 신하에 대해 예우를 갖추자 성삼문은 크게 절하며, 성은이 망극하다고 했다. 말년에 삼문은 임금에게, 당시 마음속으로 '이러한 군왕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 충성하겠노라'결심했음을 고백했다. 세종은 신분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인재를 대우했다. 그런 인재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바로 관노 출신인 장영실이다. 세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이 되자 장영실을 등용하려 했다. 그러자 대신들은 관노에게 벼슬을 내릴 수 없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래도 세종은 굽히지 않고 아버지 태종의 힘을 빌려 가면서 장영실에게 종6품의 벼슬을 내렸다.일개 관노에게 그런 자리가 주어진다는 것은 왕조가 만들어 놓은 엄격한 신분 제도와 과거제에 의한 인재 등용 정책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지만, 세종은 장영실의 천재성이 꼭 필요하다고 보고 파격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다. 세종은 왕실의 종친이라 특혜를 주는 경우도 없었고, 그 아비가 훌륭하다고 아들에게 특혜를 주는 일도 되도록이면 제한했다. 나라와 종사에 이익을 주는 작은 재주라도 가진이라면 그가 어떤 재주를 가졌건 간에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었다. 이러한 세종의 인재 등용 원칙은 즉위하면서부터 철저하게 지켜졌다. 세종은 공짜 밥을 먹고 있는 종신들과, 일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하릴없이 시간이나 때우는 무리를 철저하게 가려냈다. 이는 적잖은 저항을 불러 일으켰는데, 세종은 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밀어붙였다.
인재를 보호하다.
세종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뛰어넘어 인재를 등용했을 뿐 아니라, 등용한 인재를 보호하는 데도 힘썼다. 언관들이 황희, 김종서 등을 도덕성 문제로 집요하게 공격했지만, 공적을 이룰 때까지 그들을 보호하면서 기다렸다. 그들이 뛰어난 인재라는 것을 확신했고, 공적으로 그들의 허물이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황희는 원래 충녕대군의 왕위 등극을 반대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부왕 태종의 당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양영대군을 지지했던 그는 자신의 정적을 금방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까딱 잘못하다간 왕위에 오른 세종과 그 지지 세력에 의해 황희는 숙청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유배에서 풀려난 황희를 믿고 중용했다. 황희를 탄핵사는 상소는 계속되었지만, 세종은 황희를 감싸안았다. 세종은 황희가 판단력이 뛰어나고, 적당한 인물을 천거하는 능력도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건국 혁명 과정에서 소외되거나 희생된 사람들을 배려하는 점을 높이 샀다. 한마디로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하는 중국어가 매우 뛰어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의사 소통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어떤 기생을 연모하였는데, 종실 출신의 어떤 재상도 그 기생을 탐하고 있었다. 어느 날 김하가 그 기생집을 방문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종실의 그 재상도 한날한시에 방문하는 바람에 마주쳐 서로 얼굴을 크게 붉혔다고 한다. 그 이야기가 세종의 귀에 들어왔다. 세종은 종실 출신의 그 재상을 불러들였다.
"경은 기생 하나를 두고 김하와 다툰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사실인가?"
재상이 황공한 표정으로 얻드려, 그렇다고 말했다. 이에 세종은 험상궂은 얼굴로 말했다.
"너 같은 자는 나라에 아무 쓸모가 없으니 있으나마나 하지만, 김하는 다른 사람이 못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가 없으면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맞을 수가 없고, 중국에 가는 사신 또한 제대로 일을 못한다. 김하는 아들이 없으니 마땅히 그 기생을 김하의 첩으로 삼도로 하라. 만일 다시 한번 이런 일로 싸움을 벌인다면 너에게 벌을 줄 것이다."
이처럼 세종은 작은 재주라도 아끼고 장려했고, 쓰임새가 있는 인물은 작은 허물이 있더라도 덮어 주었다. 자신이 아끼던 인재인 유관이 죽었을 때는 홍인문 밖에 있는 그의 상가를 몸소 방문했다. 유관의 맏상제는 두어 칸에 지나지 않는 초가집 밖에 장막을 쳐 놓고 문상객을 받았다. 왕이 대궐 밖으로 나가 문상하는 일이 전에 없었던지라 상주는 황망해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자 세종은 상주에게, "유관의 죽음을 짐이 문상하지 않으면 누가 하리오, 그리고 짐이 망자를 고생만 시킨 바로 장본인일세" 하며 말을 거넸다. 세종은 흰 도포와 검은 모자에 검은 띠를 두르고 백관을 거느린 채, 장막을 쳐 놓은 곳에 엎드려 꺼이거이 구슬피 울었다.
실력 쌓기 경쟁을 일으키다.
세종은 인재들로 하여금 실력을 기르도록 의도적으로 경쟁을 부추기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왕권이 바뀐 뒤에 죽음을 앞두고 대립하게 될 성삼문과 신숙주 이야기다. 어느 추운 겨울날 밤이었다. 세종은 내관을 불러 말했다.
"집현전에 가 보고 오너라. 누가 마지막까지 책을 보고 자료를 읽고 있는지, 혹여 추위에 떠는 이는 없는지 살피거라."
얼마 뒤 내관의 보고가 올라왔다.
"신숙주가 아직도 책을 읽고 있사옵니다."
"그래 추워하지 않더냐?"
"몹시 추운지 가끔 손을 비벼 가며 책장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첫 닭이 울었다. 새벽녁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종이 다시 내관을 보내니, 내관이 돌아와 비로소 방의 불이 꺼졌다고 보고했다. 이에 세종은 강원도 명청에서 임금을 위해 만든 수달피 조끼를 벗어주며, 잠든 신숙주에게 덮어 주고 오라고 명했다. 아침이 되어 곤한 잠에서 깨어난 신숙주는 자신의 몸 위에 걸쳐져 있는 임금의 조끼 옷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그리고는 '상감마마의 어의가 아닌가'하며 눈시울을 붉히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퍼지자 조정 관료들은 모두 국왕의 덕을 칭송했다. 그런데 문제는 신숙주와 경쟁 관계에 있는 젊은 동료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 경연에 참석한 성삼문과 정인지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들은 서로 호각을 다투며 학문의 깊이와 실력에 자부심을 강하게 느끼는, 보이지 않는 경쟁 관계에 있었다. 세종은 이러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경연이 끝날 즈음 성삼문에게 혼자 남으라고 했다. 세종은 웃으며 성삼문에게 말했다.
"경은 어찌 그리 얼굴빛이 안 좋은가?"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삼문아, 내가 신숙주에게 수달피 조끼를 덮어 준 일에 공연히 시샘이 나서 그러는구나."
삼문이 펄쩍 뛰었다.
"아니옵니다"
세종이 말을 이었다.
"숙주는 마음이 여린 서생이라 내 격려가 특별히 필요한 사람이지만, 삼문 너는 내공이 뛰어나고 기개가 훌륭해 임금의 작은 은혜를 받지 않아도 훌륭히 자신을 개척할 수 있다고 본다. 해서 특별히 아무런 표시도 않는 것임을 명심하라. 나는 경을 더 아끼고 높이 평가한다."
삼문은 감격했다.
"마마의 은혜가 넓은 바다와 같사옵니다."
그 뒤로 삼문과 숙주는 경쟁적으로 죽기 살기로 일과 공부에 열정을 쏟았고, 세종은 그들을 따로 불러 각자 다른 방식으로 격려를 아끼l지 않았다.
인재 양성 기관을 설립하다.
세종에게도 인재를 가려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언제나 그렇듯, 인재는 곳곳에 널렸지만 정작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인물을 구해 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 쓸 만하다 싶으면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아니면 '왕자의 난'으로 숙청되었거나, 죄를 뒤집어쓰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세종은 학자들의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설립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움직임이 없자, 어느 날 사간원 상소를 듣고 있다가 "일찍이 집현전을 설치하려는 의논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다시 아뢰지 않는가. 열 사람쯤 뽑아 날마다 모여서 토의하게 화라"고 화를 내며 엄명을 내린다. 집현전은 인재를 모아 기른 인재 육성의 장이었다. 세종은 "한 시대가 부흥하는 것은 반드시 그 시대에 인물이 있기 때문이요, 한 시대가 쇠퇴하는 것은 반드시 세상을 구제할 만큼 유능한 보좌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국가의 인재가 모인 터전"인 집현전에서 유능한 인재를 기르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그래서 재위 16년 부터는 집현전 학사들이 경전,역사, 자서, 시부 가운데 강독한 분량을 기록했다가 월말에 보고하게 했다. 그리고 열흘에 한 차례식 당상관으로 하여금 글제를 내어 시험을 치르게 했다. 집현전은 세종 2년(1420년)에 설치되어 세조 2년(1456년)에 폐지될 때까지 37년동안 운용되었고, 그 사이에 집현전에 근무했던 학사와 관원은 100명을 넘어섰다. 37년 동안 양성되고 배출된 집현전 인재들은 조선 전기의 학문과 정치를 이끌어 가는 주역이 되었다. 집현전에 대한 세종의 애정은 각별했다. 집현전의 인적 구성을 마친 다음 날 "집현전에 적당한 수의 노비를 두도록 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집현전 학자들의 업무를 지원한 서리 열 명을 배치해 주었다. 또 요리상을 차려 주게 하고, 꿀 따위의 귀한 것을 내렸다. 열심히 연구를 시키는 만큼 대우를 해주어, 판서급의 높은 벼슬아치도 집현전 학자들을 부러워했다. 세종은 집권 초기 10년 동안을 집현전에 투자했고, 이후 10년 동안은 과실을 거두어 들였다.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에게, 놀고먹는 것은 죄악이라고 다그쳤다. 어느 날 자정에 세종은 집현전을 갑자기 방문해서 학사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우리 모두 여기서 죽을 각오로 일하자. 이 땅의 백성과 조상과 부모,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 여기서 일하다가 모두 같이 죽자."
재위 30년 동안 세종은 몇 백 명의 전문가와 최고의 문사들을 훈련하고 이들을 밤낮으로 독려했다. 이들은 보통 집현전에 23-25세에 들어가 모두 이 나라의 인재로 훌쩍 성장했다. 실력만이 살아남는 체제로 운영되었고, 이에 도태된 이들도 많았다. 살아남은 자는 최고의 실력자로 거듭났던 것이다. 이들은 집현전을 떠나 외직으로 나아갈 때면 태산 같은 자부심과, 큰 과업을 이루었다는 자긍심이 대단했다.
먼저 실천해야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
세종은, 서민들의 생활이 안정되려면 식량 공급이 원활해야 한다고 보았고, 이에 따라 농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농업 현장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나라 형편에 맞는 농서를 제작하라고 집현전에 전교를 내렸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도 결과가 올라오지 않았다. 수령들에게 그 지방의 작물 재배와 밭농사, 벼농사의 시점과 각 단계마다의 작업 시간과 지역별 강우량, 기후 등의 자료를 제작해 보고하게 하는 명을 내린 지 꽤 되었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건 평소 수령들이 이러한 일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자 세종은 몸소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경복궁 후원에 밭을 만들고, 보리씨를 뿌리고, 똥지게를 졌다. 손수 거름을 주고, 날마다 작물의 생육을 관찰했다. 신하들은 임금이 몸소 농사일을 하는 모습에 모두 놀라 말렸지만, 세종은 일을 진행하려면 스스로 먼저 모범을 보여서 가르쳐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세종이 이러한 궂은일을 시범한 것은, 이를 기록으로 남겨 각 고을 수령들을 지도하겠다는 의도였다. 이러한 작업 과정을 일일이 기록하고 직접 시범한 세종의 몸은 온통 분뇨 냄새로 찌들었고, 어전에도 진동했다. 신하들은 유난스러운 임금에게 측은한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임금이 백성의 먹고사는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이토록 지극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니 그 누구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신하들과 각 지방 수령들의 자발성을 기대하는 일은 여러 차례의 경험으로 볼 때 어려운 일이었다. 명령만으로는 안 되고, 용기와 의지를 담은 부드러운 태도와 고결한 성품도 어떤 때는 통하지 않는다. 오직 몸으로 실천하며 본보기를 보이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최만리와 담판을 짓다.
훈민정음에 대한 집권층과 지식인들의 반대는 극심했다 .반대 진영의 대표 선수는 최만리였다. 그는 칼날 같은 상소를 거듭 올렸다. 세종은 명운을 걸고 추진한 이 일을 최만리와 같은 중신이 반대하는 것에 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세종은 승지에게 명하여 최만리에게 글로 답할 수도 있었으나, 최만리에게 직접 대전으로 들라고 명했다.
"만리야, 너는 그렇게 중극 사람이 되고 싶으냐. 중국 사람이 되고 싶어 못 견디는 무리 가운데 네가 수괴였는지 내가 일찍이 몰랐구나. 그렇게 중국 사람이 되고 싶으면 압록강을 넘어서 떠나거라. 너를 따르는 그 모화의 무리들을 이끌고 이 땅을 떠나거라. 영혼과 육신이 온통 중국놈의 세례를 입어 네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 중국 되놈아."
실제로 신하에게 이렇게 육두문자에 가까운 말로 다그치기는 처음이었다. 최만리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며칠 뒤 세종은 최만리를 다시 불러,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한 번 한글 창제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최만리는 굽히려 하지 않고 다시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 상황에서 세종은 자신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최만리의 목을 당장 벨 수도 있었지만, 마음을 가라앉혔다. 다시 최만리를 불러들인 세종은 물었다.
"네가 운서를 아느냐?"
세종은 일단 많은 공부를 한 최만리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운서 같은 공부는 정사를 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최만리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대답했다.
"좋다. 그렇다면 음운학의 원리를 모르는 네가 어찌 내가 하는 일에 가타부타하며 대드느냐. 사람의 생각과 뜻을 전하는 언어의 원리와 음운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네가 인간에 대해서, 또 민본과 인도주의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어찌 알겠느냐."
세종은 최만리를 단숨에 처단할 수도 있었지만, 훈민정음을 효과적으로 반포하려면 반대 세력을 이끌고 가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최만리는 한글 창제에는 걸림돌이었지만, 세종이 아낀 인재이기도 했다. 그래서 끝까지 안고 갔던 것이다.
인재들을 몰아붙이는 극성스런 시어머니를 자처하다.
세종은 아침마다 인상을 찌푸리며 대신들에게 공부 안 한다고 잔소리를 해대고, 닦달했다. 관직을 처음 재수한 부하가 지각하자, 눈물이 쏙 나오도록 호통을 친다. "너는 무엇을 하는 자이냐. 백성과 임금을 섬기는 본분을 자각하지 못하느냐." 이런 야단에 다리를 부들부들 떠는 신하도 있었다. 그뿐 아니라 왕은 경연에서 "왜 특정사안의 조사와 공부가 미약한가. 충실히 알아보고 보고하라. 어찌 명한 일들에 제때에 당도하지 않게 하느냐.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면 곤란하다. 나라의 녹을 먹는 자들이 어찌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는가. 달포 전에 지시했던 일을 왜 이제까지 보고하지 않느냐"
정신이 하나도 없을 만큼 몰아치며 하루를 시작한다. 세종의 질책은 낮은 목소리지만 질서정연했다. 즉위 기간이 오래되면서 잔소리도 공력이 쌓여, 신하들이 입도 뻥긋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추상같은 명령이 떨어지고, 삭탈관직 되는 자가 새벽 경연에서 결정되었다. 제국의 유지와 운영을 위해 세종은 이 시어머니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신하들을 못살게 구는 것은 임금의 임무였다. 한번은 강원도 지역에 왜구가 출몰했는데, 강원도의 수령이 작전상 후퇴를 하였노라는 장계가 파말마로 궁정에 올라왔다. 그 지역의 민정과 백성의 생사를 책임지고 있는 방백이라는 자가 자신만 살고자 작전상 후퇴라는 구실로 백성을 두고 도망을 친 점을 세종은 간과하지 않았다. 관찰사가 직접 나서 증원군을 동원해 왜구를 퇴치한 뒤, 세종은 해당 지역의 수령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너는 임금을 대신해서 백성과 나라의 땅을 책임지고 지역에 내려가서 임무를 수행하는 자인데 어찌하여 스스로 한 몸 살자고 작전상 후퇴 운운하며 도망다녔는고, 왜 그땅을 사수하며 죽지 않았는고."
세종은 방백의 목을 배라고 그 자리에서 명했다. 병무에 관한 사항은 국가의 존망과 백성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기에 세종의 의지는 단호했다. 세종은 중앙 관서의 관리들뿐 아니라 현장 경영을 하는 지방 수령들을 감시 감독하는 일을 강도 높게 추진했다. 대대적인 국정 전반의 보고와 이에 다른 서슬 퍼런 민생의 점검과 단속이 이루어졌다. 특히 수령 방백들 가운데 굶어 죽게 하는 자는 중죄로 다스렸다. 해당 수령은 곤장 60대에서 90대를 쳤다. 선대 태종 시적의 고을 수령들의 나태한 자세는 세종의 등극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 갔다. 세종은 신하들을 일부러 시험하기도 했다. 군기감에 비밀리에 명하여 경복궁 안에서 밤마다 포를 쏘게 했던 것이다. 오밤중에 궁궐 뒤뜰에서 대포 소리가 들리니 궁녀들도 조금은 어순선해했다. 북쪽 변방에서 포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어느 날 아침, 천문을 관측하는 서운관 관리들이 승정원에 보고했고, 승정원에서 이를 기록해 세종에게 아뢰었다.
"어젯밤 북방에서 포 소리 같은 것이 들렸습니다."
세종은 이 보고를 하러 들어온 관리부터 크게 꾸짖었다. 요즘으로 치면 비서실장인 곽중증, 김자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대들은 궁중에서 그동안 밤마다 포 쏘는 것을 시험했는데 이를 이제야 꿈결에 듣고 북방에서 포 쏘는 소리가 들렸다고 뒤늦게 보고하느냐. 그대들이 이 나라 맥성들의 안위를 위해 사는 관리가 맞는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모든 이가 긴장한다. 세종의 기상천외한 군기 잡기와 의도는 궁정의 모든 대소 신료에게 전달되어 정신 무장으로 연결되고, 국정의 결정과 진행은 한 치도 어그러짐 없는 체계로 하나하나 정착되어 갔다.
참고도서 : CEO 세종대왕 인간경영 리더십(최기억, 이지북)/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이한우, 해냄)/ 세종의 수성 리더십(박현모, 삼성경제연구소) 출처 : 석세스파트너 2006년7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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