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안 계십니다.
유복자라더군요.
6.25 전쟁 중에 태어났으니 그럴 수도 있었겠죠.
저는 지금 이 순간까지 아버지라는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새아버지조차 없었으니까요.
저라는 사람은
아버지 없는 가정에서
단정하고 고상하신 분을 어머니로 하여
자존심 강하고 똑똑한 언니들 셋을 위로 하고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오빠가 한 분 있었다는데 전쟁 후 혼란 중에 역시 돌아가셨다는군요.
저승에 계신 아버지가 외로우셔서 동족인 오빠를 불러 가신 걸까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된 후 우리 집에는 온통 여자뿐이었습니다.
딸 넷에 어머니 한 분.
아는 분들은 이런 우리 집을 여성천국이라고 불러 주었답니다.
저는 왜 이런 집에 태어났을까요?
제가 불평 중에
제대로 기르지도 못하실 걸 왜 저를 낳으셨어요?
하고 어머니께 대들면
내가 낳고 싶어서 낳은 줄 아니?
라는 대답이 돌아오곤 했었습니다.
어이가 없었지요.
아니, 낳고 싶지 않은 걸 왜 낳아?
참 이상도 하다.
낳고 싶지 않은 아이를 어찌하여 낳으셨을까?
이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한참 후에야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어렵풋이나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태어나게 하시고
물, 바람, 햇빛, 땅이라고 불리는 자연을 영양분으로 하여 기르시고
늙음과 질병과 사고를 통하여 겸손을 알게 하시고
또 명이 다 하면 영생을 준비시키기 위해 어디론가 데리고 가시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을요.
너무 무거운가요?
다시 가벼운 얘기로 돌아가기로 해요.
[ 황진이, 선악과를 말하다, 2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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