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공부에는 정공구와 돈공부가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정공부의 과제는 인간관계에서 내 것을 갖지 않고 두루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내 자식만 챙기지 말고 두루두루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돈공부의 과제도 내 것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가진 게 없으면 어떻게 사느냐, 항변하는 분도 계실텐데
가지려면 가질 수 있고 버리려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유자재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선인입니다.
간단한 예로 박지원 선인께서 쓰신 『허생전(許生傳)』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짧게 내용을 소개하자면 허생이라는 분이 10년을 기약하고 공부에 들었는데
한 7년쯤 되니까 아내가 고생을 참지 못하고 푸념을 합니다.
평생 과거를 보러 가지도 않으면서 책은 읽어서 무엇 할셈이냐,
바가지를 끍는데 허생이 듣다못해 책을 덮고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깝도다, 내 책 읽기를 원래 십 년을 기약하고 한 것인데
이제 칠 년밖에 안 되었으니....."
그렇게 덮고는 어디를 가느냐 하면 장안에서 제일가는 부자를 찾아갑니다.
누더기를 입은 허생이 저벅저벅 들어가서 단도직입적으로
"장사를 해볼까 하오니 돈 만 냥만 빌려 주시오" 합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그것도 다 떨어진 옷을 입은 거지 행색의 사람이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하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그런데 또 그 부자는 "좋소" 하고 그 자리에서 만 냥을 내어 줍니다.
어디서 온 누구인지조차 묻지 않고 줍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서로 알아본 겁니다.
부자가 보기에 허생이 옷차림은 남루하지만 눈에 빛이 난다,
굽실거리는 태도가 없다, 뭔가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알아보고 돈을 선뜻 내준 겁니다.
허생은 또 왜 제일가는 부자를 찾아갔는가?
둘째가는 부자나 천석꾼 정도를 찾아갈 수도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
저쯤 되면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이지요.
어디서나 제일 난 인물이 첫째가 되는 건데 그 정도 인물이면 통할 거라 생각한 겁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하잖습니까?
이왕 사업을 할 바에는 재운財運이 좋은 사람의 돈으로 해야 잘될 거라는 계산도 있었고요.
제가 이 대목을 읽고서 '아, 박지원 이분은 선인이다' 했습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보통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없거든요.
허생은 그렇게 빌린 돈으로 매점매석買占賣惜을 합니다.
대추, 밤, 배 등 제사에 쓰는 과일과 말총을 다 사들입니다.
제사 안 지내면 큰 일 나는 줄 아느 게 우리 민족이지요?
그러니까 제사에 필요한 과일들을 몽땅 사서 재어 놓습니다.
또 옛날 양반들은 체면 때문에 죽으면 죽었지 갓을 안 쓰고는 외출을 못했지요?
그러니까 제주도에서 갓의 재료인 말총을 다 사들입니다.
꼭 필요한 물건이 없으니까 얼마 안 가 온 나라가 들썩거립니다.
과일과 갓의 가격이 열 배로 뜁니다.
허생이 길게 한 숨을 쉬며 탄식을 합니다.
만 냥으로 나라를 뒤흔들 수 있으니 이렇게 조그만 나라였구나,
한심하도다! 그렇게 번 돈으로 도적들과 빈민들을 구제하는 일을 하고요.
매점매석은 범죄가 아닌가, 하는 분도 계실 텐데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자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 되겠다, 하는 흐름을 보는 안목이 있었던 것이고요.
이지함 선인을 모델로 하여『허생전(許生傳)』을 썼다, 그런 말이 있더군요.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해 보니까 그보다는 박지원 자신을 모델로 하여 쓴 것이더군요.
박지원 자신도 선인이었으니까요.
선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하면 허생처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공부를 할 때는 입에 풀칠이나 하는 수준이다가도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한 그 순간부터는 대단한 사업가로 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선인입니다.
허구한 날 책만 보던 사람이 어떻게 돈벌이를 할 수 있는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는데 책을 통해서 세상사를 꿰뚫어 본 겁니다.
어떤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루면 다른 분야에도 통합니다.
대충하면 통하지 않는데 깊이 들어가서 도道가 통하면 다른 분야에서도 통하는 것입니다.
돈공부는 두 가지입니다.
반은 쓰는 공부이고 반은 버는 공부인데
사람에 따라 돈을 버는 것에는 능통한데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있고,
멋들어지게 잘 쓰는데 버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쓰는 공부의 경지는 허생이 찾아간 장안 제일의 부자처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찾아 왔을 때 물어보지도 않고 만 냥을 내 놓을 수 있는 경지입니다.
그 돈을 벌 때 얼마나 열심히 벌었겠습니까?
그래도 쓸 때는 그렇게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알아보고 단번에 그렇게 내놓을 수 있으면 쓰는 공부는 끝난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또 돈을 벌 수 있는 것이고요.
그리고 버는 공부의 경지는 허생처럼 책만 읽다가도
'벌어야겠다' 하면 돈을 벌 수 있는 것입니다.
명상하시는 분들이 가야 할 경지는 바로 그런 것이지요.
『허생전』은 모델을 제시했다고 봅니다.
선인은 이런 분이라는 걸 보여줬습니다.
[6장 돈을 다스리는 지혜,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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