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모든 것이 생각대로 되는 곳이 있다니?
그렇다면 이곳은 생각이 가장 중요한 것일까?
아니면 생각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을 것인가?
생각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움직여서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생각이 아닐까?
생각이라?
어쨌든 생각이란 것은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머리를 잘 간수하여야 할 것인가?
아니 영혼은 머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가슴'
내 몸 중에서 가슴이 가장 중요한 것일까?
아니면 더욱 중요한 곳이 또 있을까?
가슴이 해답은 아닌 것 같았다.
더욱 중요한 곳이 있을 것 같았다.
머리와 가슴은 무엇인가 만족스런 답이 아님이 느껴지고 있었다.
무엇인가 더 중요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어디인가?
어디일 것인가?
지함은 골돌이 생각에 잠겼다.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무엇인가 나를 지탱해주고 나를 일깨워 줄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나의 몸 중 어느 곳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마도 이곳을 안다면 지금의 나를 답답하게 하는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풀릴 것 같았다. 이것을 안다는 것은 수련의 첫 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일이 될 것 같았다.
이것은 아마도 자신이 이곳에 와서 지금까지 풀지 못한 최초의 문제였다.
이것을 풀고 나야 나의 지금까지의 모든 행동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가능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가 점점 무거워져 왔다.
나의 지식의 한계는 여기까지인가?
지함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어떻게 공부를 하여야 할 것인가 생각하였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답이 안나오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곳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속세에 있을 때라고 해서
시간의 흐름을 미리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 않는가?
보조적인 수단, 예를 들면 해가 뜨고 있다든지,
중천에 떴다든지, 지고 있다든지 등등의 방법을 기준으로 시간을 알지 않았던가?
그런 방법이 없이 빛이 존재하지 않는 동굴 속이나
문이 잠기고 창이 없는 방안에서 혼자 있다면
무엇으로 시간의 흐름을 예측할 수 있단 말인가?
이곳은 항상 밝고 시간의 흐름을 비교할 수 있는 어떤 장치가 없으니
당연히 시간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이곳에서 시간의 흐름을 모른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달리 생각한다면
시간의 흐름을 모른다고 해서야 무슨 일을 정확히 할 수 있단 말인가?
속(俗)에 있을 때에도 언제 무엇을 하고 언제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이
있지 않았는가?
그 기준이 시간이 아니었던가?
아버님께서 점심 때 쯤 참을 내오라고 하시면
그 때를 맞추어 모든 일이 진행되고는 하시지 않았는가?
속에서도 그랬거늘 하물며 선계인 이곳에서는
시간의 중요성이 더욱 클 것임은 분명하지 않겠는가?
'시간의 흐름'
막연히 생각하던 시간의 흐름이 갑자기 지함의 피부에 와 닿았다.
'선생님께서 내 수련기간이 서너 달이라고 하셨다지 않은가?
이곳에도 시간이 있는가?
아니면 속의 시간으로 서너 달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없어서 모르고 있었는데 어머님께서 혼잣말을 하시면서
수련기간이 서너 달이라고 하시지 않으셨는가? 잘 하면 석 달이고 못하면 넉 달인가?'
'서너 달이라...'
아직 이곳의 하루가 지난 것 같지 않았다.
이곳의 시간이 속세의 시간과 비례하여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되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루가 지난 것 같지는 않았다.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을 보니 하루 정도가 아니라 한식 경도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배가 고픈 것을 알 수 있을까?
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면서 밥을 먹으면 무엇을 한단 말인가?
밥이란 것은 몸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 유지할 필요가 있는 몸이 없으니 밥도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육신이 아닌 기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어떤 종류의 기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기체를 유지할 수 없다면
수련도 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한 일이 아닌가?
나의 기체는 어떠한 상태일까?
이곳에서 수련이 끝나면 육신을 찾아갈 수 있을까?
나의 수련 정도는 어느 수준일까?
내가 수련하는 기간은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
수련의 기준은 무엇일까?
스승님은 어떻게 하면 뵐 수 있을까?
끊임없는 질문이 스스로의 안에서 꼬리를 물고 쏟아져 나왔다.
지금은 자신의 힘으로 한가지도 해결할 수 없는 과제들이었다.
이러한 과제들을 풀어나가는 것이 수련일 것이었다.
헌데 어디에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수련의 길에 들어와 있음에도 어떻게 시작하며 어떻게 해 나가야 할 것인가?
이곳의 모든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수련이 되어나가는 과정을 밟고 있다.
헌데 이 자연스러운 것이 수련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틀림없이 내가 각고의 노력으로 돌파해 나가야 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을 맞이하였을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육신을 가지고 있을 때와 육신이 없을 때는 생각 자체도 달라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이 달라지면 수련의 결과도 달라지지 않겠는가?
수련의 결과가 달라진다면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것은 검토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생각이 달라지지 않아야 수련의 결과가 동일하게 나온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몸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모든 생각이 동일하다면
동일한 결과가 나올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수련을 마치고 속(俗)으로 돌아가야 한다.
속으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몸이 없이는 생활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몸이 있음으로 해서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나는 육신이 있는 것을 가정한 수련을 해야 할 것이다.
헌데 이곳에서는 이러한 모든 것을 스승님께 여쭈어보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어떠한 지침을 주실 지 알 수가 없을뿐더러
의사소통이 안되므로 혼자서 결정하여야 할 것 같았다.
스승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는 없었다.
허나 스승님과의 사이에 어떤 막이 드리워져서
자신이 스승님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 조건을 만들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을 스승님께서 만드시는 것인지 아니면 이곳의 관례인지 알 수 없었으나
하여튼 이러한 과정이 입학시험의 일부인 것 같았다.
이러한 시험과정이 끝나면 본격적인 수련에 들것이다.
본격적인 수련에 들면 이러한 의문도 없어질 것이다.
일단 수련에 들기로 하였으나 다시
어떠한 수련을 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에 부딪치는 것이었다.
지함은 자신이 지금까지 육신이 있는 상태에서 생활하여 왔으며,
그 이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나지 않음을 상기하였다.
육신이 없는 상태 하에서 마음만으로 수련을 한다는 것은
현재의 나로서는 무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육신이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수련을 하자.'
지함은 육신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수련을 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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