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이 이지함이 그런 못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안 된다.
지함이 이처럼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몸은 점점 느려지고 말을 듣지 않았다.
발은 무거워지고 허리까지 아파 왔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러나 이제 포기하기에는 늦었다.
어찌 할 것인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갈 뿐이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서 도저히 안되면 그때는 포기하더라도 갈 수 있는 곳까지 가자.
한 시각(15분)을 더 걸어가자 지함은 도저히 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털썩 주저앉을 지경에 이르자 스승의 걸음이 조금 느려지는 것 같았다.
'아이구. 살았다. 이제 좀 천천히 걸어도 되겠구나.'
지함은 걸음을 약간 늦추었다.
헌데 느려지는 것처럼 보였을 뿐 느려진 것은 아니었다.
스승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무엇인가?
옆을 보자 가마득한 절벽아래 구름이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왔단 말인가? 얼마 전까지 평지를 걷고 있지 않았는가? 이상할 일이다.'
지함이 내려다보자 가마득히 먼 산자락과 그 산자락의 중턱에 걸린 구름들,
그리고 그 산자락을 감싸고도는 강줄기가 내려다보이고 있었으나 너무 멀어서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적도 없었거니와 지금 내려다보아서 알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어디인가? 어느 곳이 길래 도저히 알 수 없는 곳에 와 있는 것인가?'
기억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 적도 있었으나 기억 안 나는 것이 아니라 본 적이 없는 곳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앞이 허전하였다.
무엇이 사라진 것인가?
커다란 나무나 바위가 없어진 것처럼 앞이 훤하였다.
앞을 살펴보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앞에 있던 스승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치 거대한 산맥이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내가 언제부터 스승을 그렇게 많이 의지하였던가?
이러한 것은 아까 스승의 뒷모습에서 너무나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동안 자신의 마음 깊은 곳까지도 완전히 스승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갔기 때문이 아닌가?
스승이 잠시 보이지 않는 것이 너무나 허전한 것이다.
그 허전한 것이 마치 심장이 사라진 것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전부가 사라진 것 같은 것이다.
매일 앞에 보이던 커다란 하나의 산맥이 사라진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허전할 줄이야. 스승님께서 차지하고 계시는 부분이 이렇게까지 클 줄이야.'
생각지 못할 정도로 빈자리가 컸다.
'어디로 가셨을까?'
사방을 둘러보자 절벽으로 둘러 싸여서 어디로도 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천길 낭떠러지였다.
내려다 볼 수가 없을 정도로 가마득하였다.
언뜻 보기에도 수백 길은 될 듯한 낭떠러지였다.
어디로 어떻게 올라왔는데 이렇게 갑자기 절벽이 되어 버렸는가?
내려 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나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내려갈 수 없는 천길 낭떠러지......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간다는 것은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가능하다고 해도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정도의 높이라면 올라오는 데만도 며칠이 걸릴 만큼 높은 곳이었다.
'이렇게 높은 곳을 어떻게 그렇게 금방 올라왔을까? 스승님은 어디로 가신 것일까?
그리고 올라올 때는 저녁 때였는데 지금은 한낮이 아닌가?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일까?'
지함은 무엇이 어떻게 되어 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던 중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과연 이것이 나의 모습인가?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커다란 키에 더부룩한 수염.
성인의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아니. 언제 내가 이렇게 어른이 되었단 말인가? 이럴 수가 있는가?'
지함은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갑자기 이리도 변화가 많단 말인가?
하늘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요술에 걸린 것 같았다.
그 거대하던 스승님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자신만이 혼자 절벽 위에 앉아서 변화된 모습을 보고
놀라고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이 새로웠다.
전에 보지 못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강물이 그냥 강물이 아니고 모양만 강물인 것 같았다.
산 역시 모양만 산이었지 실제의 산이 아닌 것 같았다.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괴이한 일이로다.'
산의 모양새를 갖추었으되 산이 아니고 물의 모양을 갖추었으되 물이 아닌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여야 할 것인가?
자신도 처음보는 것이었다.
산의 모양새를 갖추었으되 밟으면 밟히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으며, 물이 아니었으나
물인 것 같은 느낌만 올뿐이었다.
가만히 보니까 산의 나뭇잎들이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이 없었으며, 물이 흘러 내려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림인 것 같았다.
그림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져서 실제의 산이요, 물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럴 수가 있는가?
누가 그렸기에 이렇게 원근 감이 느껴지도록 사실 감이 나는 것인가?
정말로 그림인가?
그림이라면 내려가도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림이 아닌 것도 같았다.
만약 내려가려고 걸음을 옮겼다가 정말 낭떠러지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고 보니 그림이 아닌 것도 같았다.
물 깊은 곳에 물고기들이 보이는 것이었다.
저 멀리 있는 강물의 물고기가 어찌 보일까 만은 자세히 보자 언뜻 물고기 같은 것들이 보인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면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저 아래쪽 산줄기의 바위 위에 솟아있는 소나무 옆의 과일 나무 잎을 보자
벌레 먹은 잎새가 보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틀림없이 그림인데 당겨서 보면 당겨져서 보이는 것이었다.
그림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그림이라면 이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지함은 판단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우선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실제가 아닌 것 같으면서도 가만히 보면 실제 같기도 하였다.
'무엇인가? 나의 상식으로는 풀 수 없으니 어떠한 해답이 나오기 전까지는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다.
힘닿는 데까지 답을 구해보자. 그때까지는 어쩔 수가 없지 않은가?"
지함은 모든 것에서 멀어져 보기로 하였다.
눈을 감지 않으면 판단을 정확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 눈을 감자. 실체에서 벗어나 관념으로 보자. 나의 생각만으로 판단해 보자.'
지함은 그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아 자신의 감각에 의존하여 모든 것을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오감 중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이 살아났다.
귀로는 바람소리가 들렸으며 코로는 풀내음이 들어왔다.
엉덩이에는 차가운 바위의 냉기가 느껴졌다.
모든 것이 산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보다 멀리 감각을 확장시키자 새소리며 노루 뛰어 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풀들이 흔들리고 나뭇가지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도 들렸다.
뒤쪽으로 귀를 기울이자 물 흐르는 소리도 들리는 것이었다.
'이것이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속세의 일인가? 아니면 선계의 일인가?
스승님께서 나를 시험해 보시는 것인가?'
지함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모든 소리가 멈추었다.
고요한 가운데 파도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파도소리는 점차 커졌으며 눈을 뜨면 앞으로 닥쳐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계속 눈을 감고 있자 물방울이 손등으로, 얼굴로 튀어 오르는 것이었다.
눈을 뜨지 말자.
모든 것이 시험이 아니겠는가?
물결이 더욱 거세어져서 나중에는 지함을 덮어씌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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