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씨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호흡법을 익힌 터라 기운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그 호흡법은 6대조 할아버지가 어느 선생님께 배워서 전해주신 것으로서
비밀리에 전수해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 호흡법을 익히면 기운을 안다고 하였다.
기운을 알고 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항상 모든 것을 앞서서 알고 계셨던 것 같았다.
나라에 크고 작은 변이 일어날 때도 아버지는 어디론가 피해 계시다가 오시고는 하였다.
그럴 때에도 집안에는 이상이 없도록 준비를 철저히 하셔서 집안 사람들이 전혀 불편함이 없었을뿐더러
매사가 아버지가 계실 때처럼 이루어지고는 하였다.
무엇이든 아버지가 계실 때처럼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행하여졌다.
예를 들면 건너 마을 박참봉네가 큰 일이 있다는 전갈이 와서 아버지의 문갑을 열어보면
항상 박참봉네가 큰 일이 있을 것이니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등의 지시가 들어 있고는 하였다.
따라서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도 불안해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한 일은 우리 집에서는 대대로 있었던 평범한 일이었으므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성장하여 동네 친구들을 사귀면서부터 서서히 다른 집과 차이가 있음을 알았고
그것이 가전되는 호흡법에서 연유하였음은 커서야 알게 된 일이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호흡법을 전수받으셨던 것이다.
이 호흡법은 할아버지가 전해주신 것으로서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배우셨으나
작은 아버지는 깊이 익히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아버지만 정확히 아시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이 호흡법은 아들에게만 전수하여 주었던 것이었으나
딸인 조씨에게는 아버지 자신도 모르게 전해주셨던 것 같았다.
아버지의 옆에 있으면 왠지 마음이 평온해 졌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마음 깊이에서 전해져 오는 그 어떤 느낌에 의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파장을 받고 있으면 점차 호흡이 느려지고 그 느려진 호흡속으로
깊이 들어가고는 했었던 것이다.
숨이 느리면서도 전혀 가쁘지 않았으나 호흡이 느리다는 것을 순간 느끼고 나면
숨이 가빠지고는 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생각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은 나중에야 알았다.
자신의 생각이 가쁘다고 생각해서 숨이 가빴던 것이다.
자신이 숨가쁘게 느끼지 않으면 숨이 가쁘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의 차이, 이 생각의 차이가 숨이 가쁘고 아니고를 만들었던 것이다.
어린 조씨는 순간 숨을 쉬지 않고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인가에 생각이 미쳤다.
가만히 호흡을 멈추어 보았다. 호흡은 멈추었으나 숨이 가쁘지 않았다.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그래도 숨이 가쁘지 않았다. 점점 숨을 쉬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숨이 가빠지는 것은 아니었다.
가만히 앞을 바라보았다. 앞에서 펼쳐지는 장면들이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모든 것이 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사물이 앞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도 빛으로 바뀌면서 옆으로 흐르고 있었다.
옆으로 흐르다가는 다시 멈추고, 멈추는 듯 하다가는 다시 흐르며 서서히 이동하고 있었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 모든 색들이 얼키고 설키며 이리 저리 흐르다가는 휘돌고 하였다.
기운이 점점 약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간이 꽤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숨을 쉬지 않은 시간이 서너각(일각은 15분) 정도는 된 것일까? 앞에 할아버지 한 분이 보였다.
처음 뵙는 분이지만 왠지 아주 가까운 분이라고 느껴졌다. 이 분을 어디서 뵈었을까?
당시 13세였던 조씨는 이 할아버지가 이미 선계에 입적하신 고조부임을 알 까닭이 없었다.
"예야."
"네."
"기분이 어떠하냐?"
"약간 이상하기는 하지만 괜찮습니다."
"어디가 어떻게 이상하냐?"
"어디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이상하옵니다."
"좋은 것 같으냐? 나쁜 것 같으냐?"
"좋은 쪽인 것 같습니다."
"왜 그러한 생각을 하였느냐?"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분이 어떠하냐?"
"약간 좋은 쪽입니다."
"제대로 들어온 것이니라. 이제 앞으로 바로 보아라."
시선을 돌려 앞을 보자 어느새 아주 푸르른 색깔의 산자락이 보였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산과는 전혀 질이 다른 산이었다. 풀과 나뭇잎 하나하나가 전부 새롭게 보였다.
살아있었다.
금방이라도 살아서 움직일 것 같은 풀과 나무들이었다.
건드리면 바로 반응이 튀어나올 것 같이 생동감이 느껴졌다.
식물로부터 이러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니!
처음이었다. 동물보다도 더욱 살아있는 느낌을 식물로부터 받은 것이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그저 생명이 있다는 느낌과 다른 강도로 전해져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생명의 의미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 온 것이다.
"생명이란 이런 것이구나..."
저들 식물이 피부에 닿으면 바로 살이 될 것 같았다. 즉시 나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영향을 받을 것 같이 느껴졌다.
식물이 사람에게 이러한 느낌을 줄 수 있다니! ...
생명체!
생명이란 이렇게도 실감나는 것인가?
풀잎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저 풀들이 단순한 풀이 아닌 하나의 생명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생명체였다.
생명의 중요성과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함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실감나게 느껴져 왔다.
풀잎의 푸르른 색깔도 너무나 살아있는 색깔이었다. 이러한 색깔이 나올 수도 있구나!
그런데 지금까지 보아온 색들은 왜 이런 색깔이 아니었을까?
빛으로 이루어진 색깔이었다. 빛과 물질의 중간 정도의 색깔이었다.
이러한 색깔은 지금까지 적어도 지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자체에서 빛이 나는 것은 아니면서도 얼마든지 스스로도 밝지는 않지만
어둠속에서 형체를 밝히고도 남을 정도의 빛은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일이 흐른 후 흐려지는 빛이 아닌 영원한 빛!
어두운 곳에서 더욱 빛을 낼 수 있는 식물들. 이러한 귀한 것들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
앞산의 전체를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전부 모양은 다르지만 이러한 색깔들로 이루어진 식물들 뿐이었다.
게다가 식물들이 발산하는 파장은 아주 순하디 순한 파장이었다.
동물들이 와서 먹이로 사용하기에는 아까울 정도의 귀하디 귀한 꽃과 나무,
풀들은 마치 식물들의 귀족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풀들이 하나같이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러한 경우는 흔치 않았다.
또한 먹을 수 있는 것들은 어떠한 짐승이 어떠한 풀을 먹어도
전부 소화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어떠한 생물체가 먹어도 완벽히 소화가 될 수 있으며 소화가 되는 것은 물론,
잔여물이 전혀 남지 않아 배변의 필요성이 없을 것 같았다.
영양분과 에너지가 먹는 즉시 인체나 동물의 몸에 전달되어
저장될 것은 저장되고 발산될 것은 발산되는 것이었다.
또한 풀들 사이를 날아 다니는 나비 역시 동일한 색과 무늬로 치장되어 있었다.
투명한 듯 하면서도 색깔이 있고, 색깔이 있으면서도 투명하며 손을 내밀면 금방 잡힐 수 있겠지만
건드리면 안될 것 같았다.
무엇인가 다른 세계가 있었다. 아직까지 보지 못해온 세계가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경이였다. 이러한 세계가 있다는 것은 경이였다.
보지도 못하고 느껴지지도 않던 세계가 또 있었단 말인가?
갑자기 세상이 넓어 보였다. 내가 알고 있던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책으로 접하였던 것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모든 것은 일부였다.
그것도 아주 일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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