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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계수련 교과서/소설 선(仙)

소설 仙 (012)

by 날숨 한호흡 2008. 1. 14.

 

 

이진사는 짐짓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표정을 바꾸어

"그런 일 없네... 어흠! 자네가 먹거리를 준비해 놓고 오라고 해서 좋아서 그런 것 아닌가?"

김참봉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듯이 이진사의 얼굴을 빤히 보면서

"그래서 그렇게 즐거웠단 말인가?"

"그럼."

"그렇다면 전에는 왜 그렇게 즐거워하지 않았나?"

"아닐세. 전에도 즐거워했지. 하지만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네."

"그랬던가? 그런데 왜 지금은 그렇게 즐거워하는가?"

"어이. 그렇게 따지지 말고 어서 먹을 것이나 좀 내놓게."

"저기 애들이 벌써 가져오고 있네."

"오늘은 속이 출출해서 자네에게 오면서 내내 먹을 것 생각만 했었네. 늙으면 애가 된다더니 내가 이제는 애가 다 된 모양일세. 먹을 것만 있어도 이렇게 즐거운 것을 보니 말일세."

"그런가? 우리가 벌써 그렇게 늙었단 말인가?"

"그런가 보이."

 

술상을 앞에 놓고 김참봉은 자신의 나이를 돌아보았다. 벌써 쉰이 넘고도 수년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진사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도 이제 한 세상을 거의 다 살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벌써 그렇게 살아와 버렸단 말인가? 이제 조금 살 만한 여유가 생기고 있었다.

집안도 그런 대로 모양새를 꾸려가고, 손자들도 무럭무럭 잘 자라주고,

자신도 땅마지기나 모아서 먹거리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만큼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에 취해서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생각지도 않고 살아온 것이었다.

 

"그랬구먼. 우리가 벌써 그렇게 되었구먼!"

세월은 이미 살 만큼 산 동갑내기 친구들이 모두 공감할 만큼 지나가고 있었고,

그 세월의 흔적은 자신이 살아온 여정의 여기 저기에 배어 있었다.

 

"그래. 잘 살았지. 이제는 마무리가 아닌가?"

이상하게도 김참봉은 내내 세월 타령으로 일관했다.

허나 전에 없던 탄식조의 세월 타령이 이진사에게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처럼 즐겁게 들려 왔다.

무엇보다도 이진사는 자신의 속내를 들키지 않고 김참봉을 속여넘긴 것이 퍽이나 다행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이진사는 다시 며느리를 불렀다.

 

"오늘 내가 보니 네가 서기가 어린 꿈을 꾼 것에 대하여 김참봉이 대충 눈치를 채고 있는 것 같더라.

앞으로는 드나드는 것을 삼가고 어쩔 수 없이 드나들 때는 더욱 몸가짐을 조신히 하여

어른들께 실수가 없도록 하여라."

 

엄명을 내린 이진사는 안방으로 들어가려던 것을 바꾸어 처 조씨를 불렀다.

영문을 모르고 사랑채로 불려온 조씨를 앞에 놓고 이진사는 다짜고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였다.

 

"앞으로 며느리를 절대 심부름이나 다른 일로 내보내지 마시오."

조씨는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시오?"

"아니 당신은 여자이면서도 아직 모르고 있었단 말이요? 며느리가 아무 말 안 합디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시오? 그 애가 무슨 말씀을 드렸기에 저에게 이러신단 말입니까?"

"당신은 정말 모르고 있소?"

"모를 수 밖에요. 아무 말 없었으니 제가 무슨 내용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조씨는 며느리가 섭섭하게 생각이 되었다.

시아버지인 이진사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데 시어머니인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럴 수가 있는가 싶었다. 속으로 분이 올라오고 있던 조씨는 기어이 속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 애가 무슨 말을 당신한테 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무엇을 안다고 그러시오.

내가 그 애를 불러서 한 번 따져볼 생각이에요."

 

조씨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본 이진사는 갑자기 말을 낮추었다.

 

"다름이 아니고 그 애가 태몽을 꾸었는데 글쎄 용꿈을 꾸었다지 뭐요."

조씨는 시쿤둥하게

"그래서요?"

"그러니 집안에 경사가 나려는 것 아니겠소?"

"경사요?"

"경사 말이요. 대단한 일이 있을 것 같소. 손자를 엄청난 녀석을 보려나 보오."

"아니 난 뭐라고! 무슨 일이라도 났는 줄 알았잖아요. 그 얘기라면 나도 알아요.

내가 태몽이 없었느냐고 하니까 그 애가 무슨 꿈을 꾸긴 꾸었다고 합디다. 그래서 그것이 어떤데요?"

"그 애가 용꿈을 꾸었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것이요. 용꿈은 아무나 꾸는 것이 아니오. 더욱이

용은 천자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꿈에서라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는 영물이요.

그런데 집채만하게 큰 용이 그 애한테 왔다는 것은 집안이 되려는 것이란 말이오.

되도 아주 크게 되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오."

"용꿈 한 번 꾼 것이 무슨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고 그러시는지 모르겠구려."

"당신은 몰라서 그래요. 내가 아는 사람 치고 용꿈을 꾼 사람이 없어요. 나도 꾸어본 적이 없소.

당신은 용꿈을 꾸어봤단 말이요?"

 

그러고 보니 조씨는 할 말이 없었다. 용꿈을 꾸어보지 못한 것이다.

며느리는 집채만한 용을 보았다지 않는가? 용이 아무리 커도 그렇게 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크다고 해도 짐승의 종류 아닌가? 하지만 영물중의 영물이라던데!

아니야. 기운 그 자체라고 하지 않던가? 조씨는 며느리가 얼마 전부터 몸이 가벼워진 것을 알고 있었다.

 임신을 하면 몸이 무거운 법인데 며느리 역시 무거워하다가 최근에는 아주 가벼워하지 않던가?

분명히 무엇인가 있었다.

 

용을 본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시아버지가 자신도 모르게 무슨 보약이라도 먹였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자신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며느리가 자신을 속였다면 지금처럼 마음 편하게 자신을 바라보지 못할 것이었다.

며느리는 원래 마음이 착하고 솔직한 성격이므로 남을 속이지 못하였다.

심성이 바르고 착하여 누구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없었으며 매사가 정직하여 동네에서도 모범이 되었다.

자신이 며느리를 의심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너무나 달라진 모습에 별스런 생각이 다 드는 것이었다.

 

이튿날 조씨는 대청마루에서 멀리 산자락을 보고 있었다. 길 위로 무엇인가 다가오고 있었다.

노르스름한 것이 땅에 닿은 것도 아니고 하늘에 뜬것도 아닌 채 공중에 약간 떠서 오고 있는 것이었다.

대낮이므로 잘못 볼일은 없었다. 혹시 잘못 보았나 하여 눈을 한번 비비고 다시 앞을 보았다.

점점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오고 있었다.

나비 같기도 하고, 꽃잎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 날아오고 있었다.

가까이 온 것을 보니 자룡(보라색을 띤 용)이었다. 용인 것이다.

그 용이 점점 커지면서 보이고 있었다. 마침내 집 앞에 오자 거의 집채만한 크기로 커졌다.

뜨거운 김을 푹푹 내뿜는데도 무서운 느낌이 전혀 없었다.

 

"왜 이러는가? 난 아무 죄도 없네."

"그것이 아닙니다."

의외로 용이 말을 하였다. 동물인줄 알았는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자룡은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데도 음성은 사람의 말처럼 또렸하였다.

마치 온 몸으로 발성을 하는 것 같았다.

발성을 하되 그 소리가 자신의 모든 부위에 전달되어 오는 것이었다. 그저 소리가 아니었다.

기운이 몰려오는 것이었다. 기운에 의한 소리로 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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