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사는 조바심 끝에 며느리를 불렀다.
"얘야."
"예. 아버님."
"일전에 나한테 말한 꿈 이야기는 절대로 다른 사람한테는 하면 안 된다."
"예."
"절대로 하면 안 되느니라."
"명심하겠습니다."
"혹시 벌써 발설한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절대로 안 해야 하느니라."
"걱정 마세요."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 아니니라. 천기인 것 같아 누설되는 것이 도리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까 하는 말이다. 알았느냐? 지금 이 시각부터 네 남편에게도 이야기하지 말거라. 혹시 그 녀석이 밖에 나가서 실수를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래... 이제부터는 걸음도 조심해서 걸어야 하느니라."
"예. 아버님."
"생각도 조심해서 하고."
"예."
"절대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걱정 마세요."
"걱정은 안 한다마는... 그래도 혹시..."
"안심하세요. 일체 발설치 않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며느리에게 몇 번이고 다짐을 한 뒤에야 이진사는 마음이 놓이는 것이었다. 이진사의 표정에 다시금 기쁨이 일었다. 며칠 후면 집안에 경사가 날 것이다.
원래 며느리가 들어올 때부터 동네에서 가장 후덕하고 마음씨 고운 색시로 소문이 났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부모에게 한 마디 말대꾸 없이 너무나 살림을 잘 꾸려가서
그 많은 고부간의 갈등 한 점 없이 잘 생활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고마운 며느리가 이번에는 오랜만에 임신을 하더니 용꿈을 꾼 것이다.
엄청난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이토록 좋은 조짐은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처가 진이를 가졌을 때도 그저 하늘이 밝아오는 꿈만 꾸었지 않는가?
잘못했다가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이 행실을 잘못했다가는 아무래도 집안에 변고가 생길 것 같았다.
집안의 어른인 자신의 행동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았다.
이진사는 그간의 자신의 행실을 돌아보았다.
혹시 그 동안 살아오면서 남에게 해코지를 한 적은 없는지?
나는 그러한 뜻이 아니었는데 잘못 전달되어 다른 사람에게 가슴에 못이 박히게 한 적은 없는지?
나 잘 먹자고 남을 못살게 한 적은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잘못한 것이 있기는 있었다.
큰애가 열 서너 살 되었을 무렵, 건너 마을 과수댁 엉덩이를 훔쳐 본 기억이 난 것이다.
자신의 생각 속에서도 나쁜 짓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 과수댁의 엉덩이가 너무 예쁜 탓이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잘 한 일은 아니었다.
허나 나는 쳐다만 보았지만 김참봉은 앞에 걸어가고 있던 그 과수댁에게 말을 걸어가며
얼마나 귀찮게 하였던가... 그 녀석 과수댁을 참 좋아했지!
김참봉과 이진사는 동갑내기로서 한 마을에서 수십 년을 동고동락하며 살아오고 있었다.
표정을 얼핏만 보아도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잘못한 것이 또 있었다.
총각 때 지금의 처와 정혼이 되어 있었음에도 이웃 마을 갑순이를 좋아했었다.
마음의 죄였다. 처와는 당시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에서 정혼만 되어 있었다.
갑순이는 얼굴도 달덩이처럼 예쁘고, 행실도 고와서 인근의 총각들이 전부 마음에 품고 있었다.
자신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길을 오가다 우연히 마주치면 서로 인사를 하는 정도는 되었다.
갑순이가 자신을 보는 눈빛을 보면 갑순이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얼굴 예쁘겠다, 행실 곱겠다, 목소리가 나긋나긋하지만 그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들어보는 것이
당시 남정네들의 소원일 만큼 목소리가 아닌 표정으로 말을 하는 그녀였다.
동네 총각들의 가슴을 온통 멍들게 하여놓고 갑순이는 엉뚱하게도 먼 곳으로 시집을 갔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다고 했다.
이진사는 문득 갑순이 생각이 났다.
그때 자신이 무리를 해서라도 갑순이에게 접근을 했더라면 혹시 이루어 질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랬었다면 지금 며느리가 용꿈을 꾸는 일은 없었을 런 지도 모른다.
집안이 되려면 그 때 지금의 처와 혼사를 치룬 것이 잘 한 것 같았다.
처음에는 처가 분명한 성격이면서 생각이 깊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점차 나이가 들면서 처는 세상 이치를 알아 가는 것 같았다.
알고 있는 것만이 아니고 매사에 능동적으로 대처했다.
처가 이진사를 여러 번에 걸쳐 놀라게 한 것은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하늘이 맑은데 빨래를 걷어 들어와서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그러고 나면 반드시 비가 온다든지,
맛난 반찬을 푸짐하게 준비해 놓으면 귀한 손님이 오신다든지 등의 작은 일인 것 같으면서도
처는 생활에서 적절히 지혜를 활용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지혜가 아닌지도 몰랐다. 예지력인가?
이진사는 오늘 웬일인지 며느리의 꿈 얘기를 처에게 하고 싶었다.
며느리에게는 입 조심을 시켰지만 입이 가볍지 않은 처라면 아무에게나 꿈 얘기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니까 내가 알고 있는 일이라면 처가 알아도 무방한 것이 아닐까?
처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어야만 며느리를 더 귀하게 여기고
태어날 손자를 정성껏 길러줄 것이 아닌가?
처가 나중에서야 손자가 보통 손자가 아닌 것을 알면 나와 며느리를 얼마나 원망할 것인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이진사는 저녁에 안방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기로 작정했다.
이진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해가 아직 중천에 떠 있었다.
이진사는 김참봉을 만나서 한 나절을 보내기로 했다.
김참봉네가 오늘 농사일을 한다고 하니 막걸리와 먹을 것이 준비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김참봉이 전에 "오늘 일을 하니 놀러 오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단걸음에 김참봉네로 가자 김참봉은 마당에서 일꾼들을 부리고 있었다.
일꾼 다섯 명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고, 동네 사람 세 명이 도와주고 있었다.
이들은 김참봉으로부터 쌀가마니나 신세를 진 사람들이었다.
"여보게."
"어이. 어서 오게.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왜?"
"싱글벙글하는 것을 보니 말이야."
이진사의 얼굴에는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어려있었다.
"좋은 일은 무슨?"
시침을 떼어보지만 웃음이 감추어져 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손자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더니 신이 났구먼. 왜, 시아비가 태몽이라도 대신 꾼 것인가?"
이진사는 화들짝 놀라서
"꿈은 무슨? 태몽을 어디 꾸고 싶다고 마음대로 꾼다던가?"
"해산을 앞둔 자네 며느리가 전에 없이 새색시처럼 피어난다고 하더구먼. 인물이 태어날 징조 아닌가?"
"그래? 누가 그러던가?"
"일전에 안사람이 그러더구먼. 아무래도 귀한 손자를 볼 모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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