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미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지상에서 이루지 못했던 유일한 사랑입니다."
화담 서경덕 선생은 어떤 분이신지요?
제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눈이 멀어 처음에는 다 같은 인간인 줄 알았습니다.
허나 그분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으로서 그 정도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었습니다.
만약 그분이 젊으셨을 때 만났더라면 연인 관계로서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제가 뵈었을 때는 전혀 상대가 되질 않았습니다.
인간계에서 처음으로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제가 마음에 없었으나 저는 한 번이라도 저를 바치고 싶었던 분이었습니다.
허나 마지막에 한 번 저를 바라보아주시는 것으로 대신함으로써 저를 평생 안타깝게 만든 분이었습니다.
제가 이승에서 공부할 때 그분에게 한 번이라도 자신을 바칠 수 있었다면 한이 없었을 것이나 그렇지 못함으로 인하여 아쉬움이 있었고 그 아쉬움이 선악과 공부를 함에 결정적 도움이 되어 지금의 제가 있기도 하였습니다.
어떠한 점이 그렇게 황 선인을 못살게 만들었는지요?
처음에는 모든 양반들이 제게 무릎을 꿇었으나 그렇지 않은 분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이들이 저의 이름을 듣고 찾아오는데 그분은 알고 있을 것임에도 전혀 미동도 없었을 뿐더러 그분에게서 저에 대한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황 선인과 무슨 관계였는지요?
건방진 말이기는 하나 제 이름을 듣고 꿈쩍하지 않는 사람이 있음이 불쾌하기도 하였거니와 나중에는 어떠한 사람인가 점점 궁금함이 커져서 제가 찾아가기도 했었던 것입니다.
찾아가서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했었는지요?
남자라면 여성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헌데 차원이 달랐습니다.
전혀 미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미동이라도 있었더라면 어떻게 하려고 했었는지요?
제가 원했던 남성들과는 모두 교류를 해보는 것이 당시 저의 목표이기도 하였던지라 그분과도 교류를 하면서 한때를 보낼 생각을 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었는지요?
평소 그리움으로 간직하다가 나중에는 그분에게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지요.
그만큼밖에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좀더 공부를 하였더라면 혹 대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하였으나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 생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불가능하니까요.
예전에 말씀하시기를 지금도 선계에서 가까이 지내는 사이라고 하였는데 어떠한 관계인지요?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감히 그런 생각을 하였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제가 얼마나 철이 없었으면 그런 생각을 하였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지요?
참으로 철딱서니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산맥을 조그마한 고개로 보았으니 어찌 말이나 될법한 일이었겠는지요?
이제 알고 나니 어떤지요?
그때라고 몰랐던 것은 아니나 지금도 역시 큰 어른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당시 어떻게 화담 선인을 유혹하려 하였는지요?
제 방법이 치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시조나 가무음곡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분임을 알고 직접 찾아가서 저를 안아달라고 하였으나 그분은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 미동도 하지 않으시더이다.
여자로서 그 창피 막심함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 것인지요?
그렇기도 하였겠군요.
그 후로 그분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던 것이지요.
아무리 해도 넘을 수 없는 산이라면 차라리 그 앞에 제가 무릎을 꿇는 것이 도리이다 싶었습니다.
그 후로도 가끔 당시 어찌 하였으면 그분을 모실 수 있었을까에 대하여 생각을 하곤 했었습니다만 제 미련의 소치일 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랬는지요?
지금도 그런 미련이 있단 말이지요?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지상에서 이루지 못했던 유일한 사랑입니다.
그러한 것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것이 좋지 않겠는지요?
아마도 선악과 수련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한 번 더 내려오실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것입니다.
당시 나이는 얼마나 차이가 있었는지요?
서 선생님께서는 저보다 스무 살 정도 위이셨던 것 같습니다.
정확한 나이는 알려주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관심이 아니었던지라.....
그러한 나이 차이를 초월할 수 있었는지요?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어째서 그랬는지요?
좋은데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화담의 노년을 보살펴 주고 3년상을 치렀는지요?
노년을 살펴줄 것까지는 없었습니다.
3년상도 기생인 제가 치를 것이 무엇이 있었겠는지요?
다만 제가가 되려고 마음을 먹었으니 기간 중 제자의 예를 다한 것뿐입니다.
제자의 예를 어떻게 하였는지요?
반드시 필요한 경우 이외에는 가무음곡을 하지 않고 나름대로 가신 분에 대한 예의를 다하면서 생활하였습니다.
화담 선생이 제자로서 받아주었는지요?
처음에는 저를 많이 시험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그분이 받아주시고 아니고가 아니라 제가 제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을 시험하려 한 제가 얼마나 큰 잘못을 한 것인가에 대하여 사죄를 드리는 마음에서 제자가 되기로 하였지요.
제가 그렇게 마음먹으니 그분께서 더 이상 거리낌 없이 받아주셨습니다.
당시에는 스승과 제자가 어떠한 예를 갖추는 것 없이 둘이 상의해서 사제 간의 관계를 맺었는지요?
제가 스승님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답이 없으시므로 다시 찾아가서 스승님의 방 밖 마당에 자리를 깔고 스승님께서 계신 방을 향하여 3배를 올리고 앉아서 3일을 기다리자 스승님의 윤허가 계시었습니다.
어떻게 윤허가 있었는지요?
너의 정성이 갸륵하여 제자로 받아들이고자 하니 앞으로 내가 부르면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어떻게 하였는지요?
평소 그냥 생활하다가 문의드릴 사항이 생기면 찾아가서 여쭙는 방식으로 공부를 하였습니다.
무슨 공부를 하였는지요?
그분을 모시고 공부할 때 정해진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며, 저도 나름대로 책을 보았으니 당시 보고 있던 책의 내용 중에서 모르는 것을 찾아서 질문을 드리고 답을 구하였습니다.
화담 선생은 음률에 대하여도 질문을 드리고 답을 구하였습니다.
화담 선생은 음률에 대하여도 나름의 진리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우주의 음률이 지상에 어떻게 스며 있는지에 대한 것을 깨우쳐 주셨으며, 그로 인하여 어떠한 소리를 들을 때 그 음이 어떠한 소리를 들을 때 그 음이 어떠한 등급인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소리라고 다 소리가 아니었으며 자연의 소리에도 하늘이 배어 있는 것이 있었으며 인간의 소리에도 한낱 동물만도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스승님을 모시고 공부하는 동한 상당히 많은 답을 구할 수 있었으며 선계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자심감을 얻을 수 있었지요.
나중에 그분이 저를 제자로서 얼마나 사랑하셨는 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기생의 신분으로서 이러한 공부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였음에도 이렇게 공부할 수 있음에 대하여 하늘에 감사드립니다.
화담산방에서는 어떤 분들과 어떻게 교류하셨는지요?
특히 이율곡, 남사고, 이지함 선인들과도 만나신 적이 있으신지요?
제가 갈 때는 다른 분들이 안 계신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에 여러 선인들께서 계셨으나 저와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던 분들은 위에는 안 계십니다.
다만 위의 선인들께서 공부중이시란 것을 화담 선생께서 알려주시기는 하였으나 상호간에 마주치지 않도록 하셨으므로 기적으로 교류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랬었군요.
가끔 다른 분들을 마주치기는 하였으나 제가 기생이었어도 화담선생께 가서는 제자로서 대우를 해주셨을 뿐 기생으로 대하신 것이 아니므로 전혀 그러한 내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가급적 다른 분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하신 것 같습니다.
지족 선사와 화담 선인은 공부를 위해 찾아가셨는지요?
아니면 세인들의 말처럼 소문을 듣고 한번 만나서 유혹해 보려고 가셨는지요?
기생과 선사, 기생과 대학자와의 만남은 그 자체로 흥미 있는 사건이 아닌가 합니다.
두 분 모두 공부를 위해서 만나 뵌 것은 아니었습니다.
공부란 것이 원래 겪을 만큼 겪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것이니만큼 당시에는 잘나간다는 기생으로서 자신의 앞에서 남정네들이 무릎을 꿇는 것을 보는 것이 천하에 가장 큰 기쁨 중의 하나였지요.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는 관계였지만 그들이 스스로 제게 찾아와서는 정을 구걸하는 것을 보고 마치 하늘에 오른 듯한 기분을 자진 적도 있었고, "이 맛에 사는구나"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요. 지족 선사나 화담 선생 모두 당시에 제가 수련경력이 짧아서이기도 했겠지만,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알아보려 접근했던 것입니다.
지족 선사께서는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인간적이고 정이 풍기는 모습을 보여주셨고 나중에는 결국 제게 여성으로 태어난 이유를 알려주시기까지 했지요.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지요.(그때를 회상하는 모습으로 먼 하늘을 올려다본다)
(다시 엄숙한 표정으로) 화담 선생은 정말로 바늘 끝 하나 들어 갈 틈이 없는 분이셨지요.
엄청난 공부를 시키시면서 당시에 남정네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못된 짓은 다 하고 다니는 저를 엄히 꾸짖기도 하셨고, 선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공부를 시키시기도 하셨죠.
지금도 당시에 철딱서니 없이 선생님을 어찌 해보려 했던 것을 생각하면 저의 무모함이 부끄러워서 땅속으로 들어가고 싶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러한 것이 공부가 아닐런지요.
두 분 모두 대단하고도 대단한 분이셨지요.
정말로 인간적으로, 또는 선인으로서 존경하고 또 존경하는 분들입니다.
이러한 공부는 내면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므로 모르게 하면 보통 사람들이 알 수 없지요.
하지만 지족 선사는 그러한 것까지도 괘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지족 선사께서 파계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으나
마음의 파계가 진정한 파계라면 그분은 전혀 파계의 근처에도 가지 않으신 분이시지요.
정말로 성聖스럽고 선仙스러운 분이셨어요.
* 황진이와 서화담의 이야기는 여러 문헌에 나온다.
둘의 만남은 <어우야담>에 나온다.
- 화담처사 서경덕이 뜻이 높아 벼슬하지 않고 학문이 뺴어나다는 말을 듣고 그를 시험하고자 끈으로 허리에 <대학>을 매고 가서 절하며 말하기를, "제가 듣자오니, <예기>에 이르기를 "남자는 가죽띠를 매고 여자는 실띠를 맨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학문에 뜻을 두어 실띠를 매고 왔습니다." 하니 선생이 웃으며 가르쳤다.
황진이가 밤을 틈타 친근하게 굴며 마등이 아난을 어루만지듯 유혹했으나 화담은 끝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 이후의 이야기는 <성옹지소록>을 보자.
- 황진이는 늘 말하기를 "지족 선사는 30년 면벽을 했지만 내게 무너졌는데, 오직 화담 선생은 가까이한 지 몇 년이 지났으나 끝내 흔들리지 않았으니 이분이야말로 참 성인이다" 했다.
<성옹지소록>의 저자인 허균은 널리 알려진 대로 서화담의 제자인 허엽의 아들로서, 부친에게 직접 황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책의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다고 여겨지는 편이나 서화담이나 지족 선사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문헌들과 마찬가지로 세간의 소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기생이라는 황진이의 신분에 대한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선인의 경지에 이른 분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굳이 정확히 알릴 필요를 못 느껴서 애써 바로잡지 않았을 수도 있고, 사실을 전한들 그 지고한 경지를 세인들의 통속적인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 이후 황진이는 화담의 제자가 되었다. 아래는 화담 선방에 드나드는 황진이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 황진이는 일찍이 화담선생을 사모하여 늘 문하에 나아가 뵈었는데, 선생 또한 물리치지 않고 더불어 담소했다. <송도기이>
- 평생에 화담 선생을 사모하여 반드시 거문고를 메고 술을 걸러 선생의 거처에 가서 한껏 즐기다 돌아가곤 했다. <성옹지소록>
* 한편 <중경지>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 세칭 화담의 도학, 박연의 폭포, 황진이의 미색을 송도삼절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는 <성옹지소록> 좀더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 황진이가 화담에게 말하기를, "송도엔 삼절이 있습니다." 했다. 화담이 뭐냐고 물으니, 황진이는 "박연폭포와 선생님과 소녀이옵니다"라고 대답했으며 선생은 웃었다.
* 화담선방에 대해서 알아본다.
- 당시 개성 동문 밖 영통사 앞을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가면 기암이 병풍처럼 두른 아름다운 곳에 맑은 물이 모여 이루어진 못이 있었는데 봄이면 산에 진달래가 붉게 타올라 못까지 둘들이기에 화담(花潭)이라 일컬었다.
바로 이곳이 화단 서경덕이 은거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퇴계의 영남학파와 율곡의 기호학파라는 조선 성리학 양대 학파의 '선하(先河)'가 된 '화담학파'의 산실이 된 곳이다. 앞에서 언급한 이율곡(1536~1584), 남사고(1509~1571), 이지함(1517~1578)은 모두 황진이와 동시대를 살다 간 선인이며, 화담에게서 영향을 받은 분들이다. 선계에 계신 타선인들과의 대화내용 등 더욱 자세한 자료는 <다큐멘타리 한국의 선인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 긑으로 황진이와 서화담 간에 주고받았다고 하는 시조 두 수를 감상해 본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에 어느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화담 서경덕
내 언제 무신하여 님을 속였관대
월침 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 황진이
[ 제2장 황진이, 남자를 말하다, 10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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