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사가 떠나고 나서 얼마간 동네는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누구든 이승을 떠나는 것이었으나 이진사의 경우는 그 느낌이 남달랐다.
동네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어떤 지주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지주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무엇인가 비워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빈자리를 누군가가 메워줄 것을 고대하고 있었으나 그 사람이 금방 나타나지 않던 차
사람들은 그 사람이 바로 진이임을 서서히 깨달아 가고 있었다.
진이는 마을 일에 대하여 별로 말이 없이도 해답을 내놓은 일이 있었으며
그러한 부분이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 가고 있었다.
한 번은 장마가 질 무렵 동네의 둑이 무너질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무엇인가로 막아야 할 것이건만 누구도 무엇으로 막아야 할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워낙 큰물이 나기도 했거니와 한두 사람이 나서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닌 까닭이었다.
어느 날 진이는 이웃 마을에서 가마니를 수십 장 구해 가지고 와서는 동네 사람들을 모았다.
동네 사람들에게 삽을 들고 나와서 둑을 막을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삽을 들고 나와서 준비를 하자 진이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지휘하기 시작하였다.
가마니에 담을 흙은 제방 옆에 있는 돌이네 밭의 흙을 사용하라고 하였다.
돌이는 진이의 의도를 잘 몰랐으나 어쨌든 진이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진이의 말에 대한 신뢰가 있기도 하였으나 위급한 실정이므로
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분위기가 아니었던 때문이었다.
돌이네 밭의 흙을 담아서 제방을 막고 난 이튿날부터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이 비로 인해 다른 곳에서는 엄청난 수재가 났었지만 이 마을만은 가까스로
둑이 붕괴되는 위험을 면하였다.
여름이 지나자 마을 사람들은 비 피해가 없는 새로운 길을 내기로 했다.
헌데 그 새로운 길이 바로 제방을 위해 흙을 사용한 돌이네 밭을 지나는 곳이 되었던 것이다.
진이가 말한 대로 따른 것이 나중에 동네 사람들에게 이중의 수고를 덜어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이 두세 번 있고 나서 동네 사람들의 진이에 대한 신뢰는 점차 높아져서
많은 사람들이 의지하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중요한 동네 일에 대하여 문의하는 정도가 되었다.
진이의 동네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여 누구의 일이든지 자신의 일처럼 살펴보아 주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또한 지함의 성장 역시 동네 사람들에게는 항상 관심 거리였으며,
이 집 부자간의 일은 이웃 동네 사람들에게도 관심거리였다.
계절이 바뀌면서 이들 부자는 더 이상의 관심 대상이 되기보다는
현재의 신뢰 수준에 만족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더 이상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자신이 뜻을 폄에 있어 장애가 될 것임을 우려한 진이의 배려의 결과였다.
이들은 동네 사람들에게 항상 따뜻한 관심을 보여주면서도 주로 공적인 분야에만 관심을 가짐으로서
자신들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있었다.
속세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차 이들의 자리가 굳혀져 갔다.
애칭의 의미를 띠고 있던 진이의 이름은 막내인 지함이 성장함에 따라 진화로 바뀌었으며,
진화와 지함은 영적으로 점진적인 성장을 거듭하여 갔다.
하늘은 맑았다.
그러한 하늘이 이들의 순탄한 미래를 예지하여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맑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운은 이들의 기운을 정화시켜 주고 있었다.
이들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입고 있는 혜택은 많이 있었다.
한 사람에 대하여 선계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 주변 사람들에게 대체로 큰 재앙이 면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재앙이 오더라도 한 등급 낮추어 오는 경우가 많이 있었으며 따라서 피해가 있어도 경미하게 되었다.
진화가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이러한 기운이 이들을 감싸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들은 온화한 기운에 쌓여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이 가꾸고 있는 밭의 작물 역시 선계의 기운을 받아 보다 풍성하게 성장하고 있었으며,
어떠한 비결이 있는지 여부에 대하여는 본인도 모르고 있었다.
선계의 기운은 보다 온화하면서도 모든 것을 고르게 성장시키는 기운을 지니고 있었으며
인간의 성품을 부드럽게 하는 특성이 있었다.
따라서 선계 기운의 영향권 내에서 출생하고 성장하는 사람들은 본성이 착하고
무엇인가 남다른 것 같은 특성이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착하기는 하였으나 본성의 움직임을 간파하지 못하고 본능대로 행동함으로서
하늘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본성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본성이 원하는 바를 알고 이에 순응하며 삶을 만들어 가야 하는바
본성이 원하는 바를 알지 못함으로서 많은 실수를 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즉 하늘의 뜻을 알기는 하되 이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원칙이 없이 생활하고 있어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죄인가에 대한 의식도 없이 살고 있었다.
인간이 짓는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는 결국
하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우둔함으로 인하여 짓는 업이었다.
이러한 업은 판단이 불가능한 특성을 지니므로 지속적인 죄를 짓게 되어
깨달음의 길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따라서 많은 선인들이 인간들이 우둔함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깨우침을 주고자
노력하였으나 이러한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대상들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우를 범하여
인간 세상은 범죄의 발생이 지속되는바 되었다.
진화는 이러한 원리를 상세히 알지는 못하였으나
무엇인가 어떠한 원리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원리가 자신의 주변에 어떠한 길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허나 그 길이 자신에게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인간의 일상은 항상 선과 악이 절반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비율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약간씩 변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 세상의 일상 생활에서 나타나며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따라
흐름이 일정치 않은 경우가 생기기도 하였다.
진화의 경우 이러한 흐름의 중간을 타고 나가면서 자신의 경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항상 인간 세상의 선악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가급적 선한 방향으로 모든 일을 풀어나가고자 하였으나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이 선한 방향으로만 가는 것은 아니었다.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였으나 그것이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결례가 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이러한 경우는 운명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으며,
점차 인간 세상의 일들에 대하여 자신의 뜻을 펴는 것이 쉽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글을 읽다가 먼 하늘을 바라보던 진화는 문득 이웃 마을 친구가 보고 싶어지자 집을 나섰다.
하늘이 맑고 구름이 고운 날이었다.
이웃 마을에 가기 위해서는 개울을 건너야 하였다.
진화는 개울을 건너기 위해 신발을 벗고 버선을 벗으려는데 문득 건너편에
한 처녀가 빨래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처녀는 혼자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그 자태가 너무 고와서 다시 한 번 쳐다보려 하였으나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지 않을 수는 없었다.
평소에 건너던 곳으로 건너려 하자 건너편의 처녀가 말했다.
"그리로 건너지 마시고 저 쪽으로 건너시면 쉽게 건너실 수 있습니다."
남녀가 유별하므로 서로 말을 하지 않던 시기였다.
허나 건너편의 처녀는 스스럼없이 말을 해 준 것이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처녀가 알려 준 곳으로 건너면서 보니 자신이 건너려 하던 곳에 웅덩이가 깊이 패여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외간 남자에게 그러한 것을 알려 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진화는 개울을 건너서 신을 신고 처녀에게 다가갔다.
옆모습이 더욱 아리따워 보였다.
감사 인사를 하기는 하여야 할 것인데 무슨 말을 하여야 할 것인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무엇보다 그 처녀가 누구인지가 궁금하였다.
"고맙소이다. 뉘신지 알아도 되겠소?"
"아닙니다. 저는 이 곳 사람이 아니니 괘념치 마시고 가시던 길을 가시옵소서."
"...... 하여튼 고맙소이다. 하지만 성함이라도..."
"아니옵니다. 그냥 가시옵소서."
진화는 그 날 더 이상 물어보지 못하고 길을 갔다.
나중에 가다 돌아보니 처녀는 여전히 빨래를 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물어 볼 것을 용기가 없었나 생각하며 제발 그 처녀가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있어 주길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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