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힘!
무의식은 인간의 의식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있으면서 작용이 되지 않는 부분인가?
아니면 아주 없는 의식일까?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의 내부에서 자신을 조종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의식이 바로 무의식인 것이다.
이진사는 자신이 방금 무의식을 보았음을 알았다.
무의식을 느끼고 깨달은 것이다. 자신은 방금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온 것이다.
들어왔다가 다시 무의식을 가지고 의식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의식이란 무엇이고,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의식은 살아있는 생각이고, 무의식은 죽어있는 생각인가?
아닌 것 같았다. 무의식은 나를 움직이고 있는 바닷속 깊은 곳의 생각과 같은 것이었다.
의식은 그 바다의 파도처럼 표면상으로 보이는 것일 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의식인 것 같지만,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정말로 자신을 움직여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에 의존하며 살아온 것일까?
나를 살아가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쫓아가며 살았는가?
무엇이 나를 살아가게 만들었는가?
나를 태어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내가 이 나이 되도록 나 자신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나를 제대로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럼으로 인하여 남 역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남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아니다.
남을 알면 나를 알 수 있는 것 아닐까?
남은 나의 또 다른 모습일까?
나를 모르면 알 수 없는 것은 나인가? 남인가?
남과 나의 차이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이 다른 사람과 다른가?
다른 사람은 또 나와 무엇이 다른가?
생긴 것이 다른가?
아니면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가?
먹는 것이 다른가?
??????
이 세상에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는 것이라곤 내가 살아있다는 것과 살아있는 시간이 별로 많지 않음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나머지 생을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인가?
다른 것은 전부 제대로 되지 않을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에 대하여서만은 정확히 알고 싶었다.
나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무엇을 알았다고 할 것이며, 나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무슨 삶을 살았다고 할 것인가?
사람이 살아있음은 무엇인가?
살아있음으로 인하여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은 삶을 통하여 자신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이 기회는 인간으로 하여금 현재의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본래의 자신의 모든 것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인가?
현재의 자신은 본래의 자신과 무엇이 다른가?
본래의 자신은 현재의 자신에게 얼마만큼을 투자하는 것인가?
이 투자한 것을 나는 어떻게 가꾸어 가야 하는 것인가?
어쨌든 가야 할 것 같았다. 가야 할 길이 아직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 너무 많이 남아 있는 길은 정말로 잘 가야 할 길인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은 가지 말아야 할 길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순간에는 아무런 판단도 되지 않았다.
살아 있음을 느낄 때는, 즉 속세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을 과감하고 신속히 처리하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러한 내가 왜 이렇게 판단의 기준을 잃어버리고 혼돈속에 있는 것인가?
내가 가지고 있던 세상을 재는 잣대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래도 나름대로 나의 잣대가 세상을 재는데 유용하게 사용되어 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닌 것 같은 것이다.
내가 사용하던 잣대가 현재의 상태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 나는 어디에 와 있는 것인가?
이곳은 도대체 어떠한 곳이기에 나의 생각이 이렇게도 무뎌져 버린 것일까?
속세에서 사용하던 잣대는 속세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잣대인가?
그렇다면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는 새로운 잣대를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
새로운 잣대는 무엇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
그 잣대는 무엇을 재려고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
어쨌든 자를 만들기는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이왕 만들바에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잴 수 있는 자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자는 나름대로 쓸모가 있었다고 생각하였지만
여기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자를 만들어 여기에서 사용한다고 해도 다시 속세로 돌아가면
다른 또 하나의 자를 만들어야 할 것 아닌가?
옛날의 자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때 자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아야 지금 또다른 자라도 만들 것이 아닌가?
이진사는 가만히 예전에 무엇을 기준으로 삶을 재는 자를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생각이었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배워온 기준으로 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기준은 자신이 터득한 지식이었다.
그렇다면 그 지식은 정확한 것이었을까?
아닌 것 같았다.
당시에는 정말로 더 이상의 잣대가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 지금 생각하니
아무 것도 모르고 한 짓 아닌가?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모르는 것이었으며 모르겠다고 생각하였던 것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이러한 일들이 어떠한 연유로 일어나고 있는가에 생각이 미치자
근본을 탐색하여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근본이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모든 것을 재점검하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이었던가?
내가 이렇게 이 세상에 태어나 모든 것을 만나고 헤어지며
이 세상을 전부 안 듯이 하며 살아왔던 것은 그 무엇이었던가?
인간 세상의 짧은 지식으로 모든 것의 해답을 구하고, 그 해답으로 모든 것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가?
비록 40여년의 한 평생이었지만, 나름대로 똑똑하다는 평을 듣고 있던 자신이었지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 세상이 그렇게 단순한 것도 아니었으며, 단순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엄청나게 복잡한 것이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가 거기에 있었다.
이 문제를 풀 수 있다면 수련에 있어 모든 어려움은 결코 장애물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어떠한 해답도 알아낼 수 있도록 된다면 그 이상의 공부가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랴?
그 다음엔 중생을 구하는 일에 나서리라.
중생을 구하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여부에 대하여도 자신이 없기는 하였다. 구할 수 있다면 하늘이 그냥 놓아두었겠는가?
하늘도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하려 한 것은 아닐까?
인간 세상은 극에서 극이 혼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혼재는 혼돈을 불러오고, 혼돈은 무질서를 불러 결국은 인간이 방향을 잃게 만들고 이 잃어버린 방향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만들면서 자신의 길을 스스로 알아내도록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길을 알아낸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던가?
공부깨나 했다고 자부하는 내가 이렇게 헤매이고 있지 않는가?
나는 정말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건만 지금 와서 보니 그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나보다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야 한단 말인가?
나는 그래도 갈 수 있을만큼은 온 것이다.
하지만 혼자서 갈 수도 없는 사람들이 배움의 길마저 없을 때는
어떻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길이란 이렇게 어려운데 어느 방향으로 가야한단 말인가?
이진사는 혼돈속에서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였다. 심호흡을 하는 순간 의식이 맑아져 옴을 느꼈다.
의식이 맑아져 온다는 것은 제 정신이 든다는 것이 아니던가?
호흡으로 가야 할 것을 생각으로 가려한 것은 아니었던가?
그렇다. 호흡으로 가야 할 것이었다. 생각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생각으로 갈 수 있었다면 나보다 더 생각을 많이 하고 더 많이 공부했던 사람들이 모두 갔을 것이었다.
생각으로 갈 수 없는 곳이므로 생각으로 가지 못한 것이었을 것이었다.
생각은 아니다.
그렇다면 생각은 언제 하여야 하는 것인가?
생각이란 필요없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생각만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생각이 없어도 안되는 것이면서도 생각만으로는 갈 수 없는 진리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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