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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감성과 영성을 위한 글/행복 이야기

[첫 번째 할일]사랑에 송두리째 걸어보기

by 날숨 한호흡 2007. 11. 29.

 

 

 

"저 사람은 좀 이상해!"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그는 3층에 사는 수란과 헤어진 뒤에도 줄곧 아파트 주변에 나타났다.

그러고는 건물 앞에 쌓인 파이프 더미에 몇 시간씩 앉아 있고는 했다.

사람들은 예전에 그가 수란과 사귈 때, 바로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끔 그는 옆 건물 옥상에 나타나기도 했다.

난간 모서리에 걸터앉은 모습이 위험천만해 보였다.

사람들은 그가 옥상에서 수란의 집을 내려다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창 연애를 할 때도 그곳에서 집 안 동정을 살피다가 수란의 부모님이 외출하는 것을 보고는

슬그머니 애인의 집에 들어가기도 했던 것이다.

 

여름과 가을 내내 그는 그 두 곳에 계속 나타났다.

바람이 불건, 비가 오건, 태양이 작열하건 상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와 수란이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 몰랐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수란의 부모님, 특히 어머니가 둘이 사귀는 것을 결사반대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수란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저토록 바보 같으니 반대하는 게 당연하지."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가 무슨 말썽이라도 피우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을 놓았다.

그는 거기에 하루종일 멍청하게 앉아 있을 뿐, 눈에 띄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지고, 바람에 낙엽이 어지럽게 휘날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건물 앞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뭔가를 하는 것이 보였다.

버려진 파이프들을 모아 어깨에 지고 어디론가 부지런히 나르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파이프를 메고 가는지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파이프 더미는 오래전부터 그곳에 버려져 있었고,

발에 차이는 것이 불편했지만 사람들은 어느덧 익숙해진 터였다.

 

그는 사흘 내내 파이프들을 지고 날랐다.

아주 먼 곳으로 옮기는지 한 번 오갈 때마다 한 시간쯤 걸렸다.

파이프는 쇠로 만들어져 무거웠으므로 어깨에 올려놓고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딛는 그의 모습이

무척 힘겨워 보였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몇 달 내내 그 파이프 더미에 앉아 지냈는데, 그것을 옮기면 이제 어디에 앉겠다는 것인지...,

 

사실 더 궁금한 점은 '왜 그것들을 옮겼을까' 하는 것이었다.

 

파이프 더미가 없어지자 아파트 앞 공터가 아주 밝고 넓어졌다.

사람들은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됐다.

전에는 왜 파이프 치울 생각을 아무도 하지 못했을까?

 

며칠 동안 눈이 내렸다.

 

희뿌윰한 눈발 속에 눈에 익은 누군가의 뒷모습이 어른거렸다.

그 사람이었다.

그는 말끔해진 아파트 공터에 엎드려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이따금 기침을 하기도 했다.

기침이 얼마나 심했는지, 한번 시작되면 그 자리에서 꿈쩍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며 한마디씩 했다.

 

"저 사람은 확실히 문제가 있어.

몸도 안 좋은 것 같은데 가뜩이나 날씨 사나운 날 도대체 뭘 하는 거지?"

 

눈발이 점점 더 세져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폭설로 변했지만

그는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서서히 눈이 그치고 난 뒤 그 사람이 사라졌다.

그 이후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이 없었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자 공터의 메마른 흙을 털어낸 작고 여린 생명들이 햇살을 쬐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검은 땅이 점점 짙은 초록빛으로 뒤덮였다.

 

밤새 비가 온 다음 날 아침, 누군가 갑자기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꽃이 피었어!"

 

깜짝 놀란 사람들이 집에서 나와 공터에 핀 꽃들을 살펴보았다.

여러가지 색깔의 꽃들이 사람들의 얼굴을 환하게 물들였다.

 

그때, 어떤 사람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음....물망초가 이렇게 많다니..."

 

물망초는 이름 그대로 '나를 잊지 말아달라' 는 꽃말을 가진 꽃이었다.

 

높은 층에 사는 사람들은 또 다른 광경을 목격했다.

꽃들이 몇 개의 큰 글자 모양으로 심어져 있는 것이었다.

 

글을 이제 막 깨우친 어린아이가 그것을 한 글자씩 읽었다.

창문 밖으로 바라보던 아이들이 목청 높여 따라 읽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수.란.사.랑.해."

 

한 여자가 커텐 뒤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할 49가지, 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