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유명한 과학자인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퇴근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낯익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날마다 무심하게 지나치던 곳이었지만 수십 년 전 그가 졸업한 초등학교였다.
건물은 옛날과 같은 모습으로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일상에 쫓겨 의식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그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어두컴컴한 건물을 바라보았다.
문득 한쪽 구석에서 붉은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설마... 마리아 선생님이 아직도 여기에 사신단 말인가?'
초등학교 시절, 수학을 가르치시던 마리아 선생님은 당시 학교 건물에 딸린 사택에 혼자 사셨다.
그는 무심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어떻게 선생님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을까?'
그는 마리아 선생님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던 학생이었다.
선생님은 그가 수학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자주 말했다.
그가 물리학을 전공하겠다고 결심한 것도 마리아 선생님의 격려가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나무가 심어진 길을 따라 교정으로 걸어 들어갔다.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희미했다.
'설마 여전히 여기 사시는 건 아니겠지? 아니, 아직 살아 계시기는 한 걸까?
연세가 꽤 많으실 텐데...'
조심조심 계단을 올라가 사택에 이르렀다. 노크를 하려고 보니 문이 열려 있어 고개를 살짝 들이밀고
안을 들여다봤다. 비어 있는 듯했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거기 누구세요?"
그가 고개를 돌리자 키가 작고 마른 여자가 서 있었다. 마리아 선생님이란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예전과 변함없는 모습이었지만 시간이 오래 흘렀으므로 머리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저 모르시겠어요?"
마리아 선생님은 그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엄숙하고 예의 바른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들어오세요."
"마리아 선생님, 정말 저를 몰라보시겠어요? 저는...."
선생님은 잠시 아래위로 그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눈을 크게 뜨며 조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페이샤 스바노프... 페이샤, 어서 들어오게. 이리 와서 앉아. 페이샤, 탁자 앞으로 와서 앉게.
자네가 오다니!"
그는 선생님의 손을 잡고 싶어 순간적으로 손을 내밀었다가 얼른 거두어들였다.
어머니뻘 되는 분의 손을 마구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마리아 선생님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래, 페이샤. 우선 자네 이야기를 해봐. 일은 잘되고? 결혼은 했나?"
선생님은 이것저것 질문을 한 아름 쏟아냈다.
"네, 결혼했어요."
"행복한가?"
"아주 행복해요! 아들 딸 하나씩을 두었지요."
"그래, 일은 어떤가? 요즘은 무슨 구상을 하고 있지?"
"선생님, 우리 그냥 옛날 이야기해요, 학교 이야기요."
"자네 반에 개구장이지만 재능이 많은 애들이 있었던 게 기억나.
자네와 친한 친구들이 특히 말썽꾸러기였지."
"선생님, 제게 수학 점수를 60점 주셨던 거 기억하세요? 아마 4학년 때 였을걸요."
"기억나네. 자네가 숙제를 안 해와서 그랬지. 자네는 수학을 굉장히 잘했지만
가끔 너무 게으름을 피웠어. 친구들이랑 장난을 치다가 혼도 자주 났지."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미샤라고 기억나니? 그 친구, 기자가 됐어. 전국 각지로 출장을 다니는데 해외로도 간다더구나."
"그 친구가 왔었나요?"
"아니"
"아, 네... 다들 바쁘겠죠. 올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공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선생님, 누가 선생님을 뵈러 왔었나요? 저희 반 친구들을 만난 적 없으세요?
울리아는 만나보셨어요? 그 애는 배우가 됐어요.
선생님이 걔한테 연기에 소질이 있다고 말씀하셨던 거 기억나세요?"
"영화에서만 봤단다."
"그 친구들도 한 번도 온 적이 없단 말씀인가요?"
"그래, 안 왔단다."
"그래도 편지는 자주 받으셨겠죠?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직장 때문에 뿔뿔히 흩어졌지만
모두들 선생님께 정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거든요."
"아니, 페이샤."
선생님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샤샤는 자주 온단다. 그 애는 아주 힘들게 살고 있지. 그 아이는 자주 와."
잠시 대화가 끊기고 어색한 순간이 이어졌다. 그는 선생님의 눈길을 따라 책꽂이로 시선을 옮겼다.
눈에 익은 책이 보였다. 자신이 쓴 양자물리학에 관한 전문적 내용의 학술서였다.
"선생님, 제가 쓴 책을 가지고 계시네요."
그러나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그 책을 선생님께 보내 드린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 읽어봤지. 너무 어려운 내용이더구나.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꾹 참고 끝까지 봤단다. 난 네가 자랑스럽다. 페이샤. 훌륭한 학자가 돼주어 고맙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쓴 책을 책꽂이에서 꺼내며 말했다.
"선생님, 제가 책에 사인을 해드려도 괜찮을까요?"
책장에 글을 쓰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를 바라보던 선생님이 말했다.
"아, 깜빡했구나. 이렇게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차도 안 내놓다니...., 내가 요즘 이렇단다.
무슨 차를 마시겠니?"
선생님이 차를 준비하러 주방으로 간 사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빠끔히 열린 방문을 발견했다.
아무 생각 없이 문틈으로 선생님의 방 안을 들여다본 순간, 그는 너무 놀라 숨이 멎는 듯했다.
선생님의 방은 사방 벽면이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제자들의 사진이었다.
그 밑에는 최근 근황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에 대한 신문기사 스크랩이 붙어 있는 것도 눈에 띄었다.
마리아 선생님의 방은, 선생님의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이 내다주신 차를 마시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대체 무슨 말이 오갔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뒷목에 강력한 충격을 받은 느낌이었다.
그는 선생님과의 대화를 서둘러 마치고 방을 나왔다.
선생님이 학교 밖까지 배웅해주었지만, 그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을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그때, 마리아 선생님이 걸음을 멈추더니 조심스레 물어왔다.
"페이샤, 솔직하게 말해주렴. 네 책에 내 영향이 조금이라도 있었니?"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오늘날 전..."
선생님은 그윽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서운해한다고 생각하니? 아니란다. 내일 학생들에게 말해줘야겠다. 자랑스러운 선배가
학교에 다녀갔다고 해야지. 어서 가렴, 페이샤.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해내길 바란다.
부디 행복하고..."
선생님과 헤어진 그는 힘없이 그는 힘없이 거리를 걸어갔다.
한참 걷다 뒤를 돌아 보았더니 마리아 선생님은 아직도 교문 옆에 서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힘없이 거리를 걸어갔다. 한참 걷다 뒤를 돌아 보았더니
마리아 선생님은 아직도 교문 옆에 서 잇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그 생각마저 부끄러웠다.
오래전에도 편지를 쓰겠다고 결심했다가 유야무야 넘어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우체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우체국에 들어가 마리아 선생님께 전보를 보냈다.
마리아 선생님이 받은 전보에는 단 한 줄의 글만이 씌어 있었다.
"선생님, 저희를 용서하세요."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할 49가지,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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