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제가 대학생일 때 어느 봉쇄 수녀원에 가본 일이 있었습니다.
가족 면회를 1년에 한 번밖에 허락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서 대화해야 했습니다.
그곳에 계시는 수녀님들은 전혀 밖으로 나오지 않으시더군요.
그 안에서 자급자족하고 기도하면서 사시더군요.
제가 그때 그분들의 모습이 너무나 평안하신 것에 놀랐습니다.
굉장히 충만한 생활을 하고 계시더군요.
서약을 하고 자신의 몸을 바친 분들인데 몸을 바친다는 것은
곧 마음을 바친다는 얘기지요.
마음은 보이지 않으니까 몸을 바친 것입니다.
"몸을 바쳐 헌신한다" 는 말 속에는
내 몸과 마음을 함부로 굴리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김동리의 「등신불」이라는 소설을 보면
자기 몸을 태워 공양을 올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몸을 내놓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최고의 보시입니다.
'살아생전에는 도道를 구할 수 없어서 하늘 앞에 몸이라도 내놓겠다'
하는 마음입니다.
그 등신불이 실제로 중국에 있는데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습니다.
예전에 화상을 입은 분을 뵌 적이 있는데
조그마한 화상에도 통증은 참 엄청나더군요.
그러니 자신의 온몸을 천천히 아래서부터 태우는 건
얼마나 고통이 심했겠습니까?
몸을 귀하게 여기면 마음이 귀해지고,
몸을 중요하게 여기면 마음이 중요해집니다.
그러기에 몸을 귀하고 깨끗하게 간수하는 것은 굉장히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성을 선악과로 상징하여 금기시하는 것에는 그런 뜻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어쩌다 보니까 못해봤다' 라는 입장인 분도 계십니다.
예를 들어 40대 노총각, 노처녀인데,
상황이 안 되고 기회가 안 돼서 못해봤다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못한 것과 스스로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몸을 바친 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있습니다.
'나는 있는데 형편이 안 돼서 못 누린다' 고 생각하면 끝없이 괴로워집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불행해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나는 처음부터 없다'고 생각하면 쉬워집니다.
'없다'고 생각하면 그 다음에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뜻밖에 주어지는 것들은 선물로 느껴집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금하기보다는 스스로 먼저 금해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금촉수련을 할 때도 '나의 몸과 마음을 온전하고 깨끗하게 바친다' 는
마음으로 임해보시면 아마 다른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결과는 충만함이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제사 비로소 나를 하늘에 바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 이렇게 반가워하고, 고마워하고, 축복으로 여겨야 하지 않겠는지요?
물론 다른 바칠 게 있다면 그걸 바치면 됩니다.
돈이 있으면 돈을 바치고, 재능이 있으면 재능을 바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게 있나요?
가진 것이라고는 몸 하나입니다.
저도 금촉을 하다 보니까
하늘 앞에 바칠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제라도 몸과 마음을 순결하게 바치겠다' 고
마음을 능동적으로 바꾸니까 금촉이 쉬워지더군요.
편안한 마음으로 저를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내놓고, 가장 귀한 것을 얻었던 것이지요.
[ 7장 우주의 사랑으로 가는 길, 28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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