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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활의 발견/역사와 인물 이야기

성삼문..

by 날숨 한호흡 2013. 8. 20.

 

(퍼온글입니다..)

 

 

 

성삼문은 사육신중 한 사람이다.

조선 4대 임금 세종대왕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병사하자

그 아들 단종(端宗)이 열두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필하던 3정승을 죽이거나 귀양보내고

자기동생 안평대군도 강화도로 내 쫓아 죽인 후 정권을 장악한다.

이것이 계유정난이다.

 

 

 

수양대군의 기세에 몰린 단종이 재위 3년만에 왕위를 넘겨주자 수양대군은 임금이 된다.

 

 

이 같은 수양의 행위에 대해 집현전 학사 성삼문과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등이 단종 복위와 반역파 숙청을 도모한다.


세조 6년,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는 잔치가 궁궐에서 열리자 성삼문 등은

이 기회에 일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같이 거사를 하기로 약속한 김질(金礩)의 고발로 세조에게 잡혀 극형에 처해진다.

이일로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떨어져 영월에 귀양가서 죽는 비운의 역사가 시작된다.

성삼문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요동에 귀양와 있던 음운학자 황찬(黃瓚)을 

13번이나 만나러 다닐 정도로 열성적 학자였다.

 

그도 단종 복위에 앞장섰으나 발각돼 39세를 마지막으로 처형됐다.

 

 

성삼문이 거사 실패로 잡혀 고문을 받을 때 세조가 묻는다.

거취를 분명히 하라고,

 

그러자 성삼문은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

 

 

라고 답해버린다.

 

세조는 죽기를 각오한 성삼문의 의지를 알게 됐다.

또 세조가 성삼문을 직접 심문할 때도 끝내 왕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 라고 불렀다.

세조가 다시 묻는다.

 

“ 네가 나를 나으리라고 하니 그럼 내가 준 녹봉(급여)은 왜 먹었느냐”

 

그러자 성삼문은

“상왕(단종)이 계시는데 어찌 내가 나으리의 신하인가. 당신이 준 녹은 하나도

먹지 않았으니 내 집을 수색해보라”고 했다.

세조가 명하여 집을 수색하니

즉위 첫 날부터 받은 녹봉에 어느 날 받은 녹이라고 표시를 해 전부 그대로 보관돼 있었다.

 

 

이런 태도에 화가 난 세조는 쇠를 불에 달궈 단근질로 성삼문의 다리를 뚫고 팔을 지졌으나

 

“ 쇠가 식었구나, 다시 달구어 오라”고 성삼문이 말한다.

국문을 마치고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가면서 또 한수의 시를 읊는다.


 

북소리 둥둥 이 목숨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지는 해는 서산을 넘네
저승으로 가는 길엔 주막도 없다는데
이 밤은 어느 집에서 쉬어 갈수 있을까 

 

 

돌아보니 어린 딸이 울면서 따라온다.


성삼문은

“사내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살겠구나” 하면서 목이 메어 말을 잊지 못했다.

 

당시 역적들은 삼족을 멸하거나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들은 노비를 삼았기 때문이다.

성삼문은 이날 이개, 하위지, 유응부 등과 함께 처형됐다.

 

성삼문은 본관 창녕(昌寧). 자 근보(謹甫)·눌옹(訥翁). 호 매죽헌(梅竹軒).

시호 충문(忠文). 사육신의(死六臣) 한 사람이다.

1418년(태종 18년) 무관 성승(成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시 그의 모친이 꿈에서 '낳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 받았다고 해서
이름은 삼문(三問)이라고 지었다.

1435년(세종 17) 생원(生員)시에 합격하였고 143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하였고,

경연 시강관(侍講官), 사간원 우사간(右司諫), 집현전 부제학(副提學),

예조 참의(參義), 동부승지(同副承旨), 우/좌부승지(右/左副承旨) 등을 역임했다.

 

그 후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42년 박팽년(朴彭年)·신숙주·하위지·이석정(李石亭) 등과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한글의 창제를 위해 정음청(正音廳)에서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 박팽년·신숙주·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 등과 함께

요동(遼東)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音韻)을 질의하고 다시 명나라에 건너가 음운 연구를 겸하여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 그 정확을 기한 끝에

1446년 9월 29일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455년 세조가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1456(세조 2)년 6월 명나라 사신이 귀국하는 환송연 자리에서

아버지 성승(成勝)과 무인 유응부(兪應孚) 등이 국왕 양쪽에서 칼을 들고 지켜 서있는

운검(雲劍)의 기회에 세조일파를 척결하고 단종복위를 계획하였다가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金礩)이 실패를 우려하여 이를 밀고하여

성삼문 등 가담자(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등) 전원이 처벌되었다.

 

 

체포되어 친국(親鞫)을 받고 다른 주모자들(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과 함께

작형(灼刑)을 당하였고,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형(車裂刑)을 받았다.

(유성원은 자살). 이어 아버지 승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극형에 처해졌고,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 세 동생과, 맹첨(孟詹)·맹년(孟年)·맹종(孟終)과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처형되었고,
여자들은 모두 노예가 되었다.

 

 

1691(숙종 17)년에 사육신의 관직이 복구되고 민절(愍節)이라는 사액을 내려

노량진에 민절서원을 세워 신위를 모시게 했다.

 

 

그 밖에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 그의 옛집 녹운서원(綠雲書院),

영월의 창절서원(彰節書院), 의성의 학산 충렬사(鶴山忠烈祠),

창녕의 물계세덕사(勿溪世德祠), 연산(連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6신과 함께 제향되고 있으며, 1758년(영조 34)에는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문집에 《성근보집(成謹甫集)》이 있다.